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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 '탈민족주의 시대의 민족담론' 주제로 열린 한국철학자대회
학술대회 : '탈민족주의 시대의 민족담론' 주제로 열린 한국철학자대회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10.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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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실종된 민족담론

지난 10월 10일부터 3일간 열린 한국철학자대회의 첫째날은 송두율 교수의 참석여부 때문에 다소 어수선하게 진행됐다. '탈민족시대의 민족담론'이란 주제 아래 이삼열 숭실대 교수,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송두율 뮌스터대 교수, 남경희 이화여대 교수, 윤건차 가나가와대 교수 등 5명이 주제발표를 했는데, 세 번째 발표자였던 송 교수는 검찰조사를 마치고 오느라 윤건차 교수 다음에 가까스로 시간을 맞춰 발제문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논평자의 면면은 기대심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통일 논의에서 본 민족과 평화'를 발표한 이삼열 교수에게는 박정순 연세대 교수가, '최근의 동북아시아 국제관계와 한민족의 위치'를 발표한 김학준 사장에게는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각각 토론자로 나섰고, 송두율 교수에 대해서는 이진우 계명대 교수가 논평했다. 다들 이념적으로 상반된 면이 두드러진 짝인 것이다.

이진우-송두율, 맥없는 한판

이날 이진우 교수의 논평문은 가장 주목을 받았다. 송두율 교수의 발제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동시성의 움직임과, 종교적 대립이나 경제적 격차 같은 비동시성의 움직임이 교차하는 상황이다. 송 교수는 북한을 예로 들며 북한이 통일논의에서 세계화에 역행하는 비동시성의 민족공조를 강조하는 반면 남한은 세계화에 순응하는 동시성을 강조하는데, '민족'이라는 것이 이런 남한과 북한의 차이를 긴장 속에 통합시킬 수 있는 강력한 이념적 자원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을 "동시성과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이론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송 교수의 발제문이 민족공동체의 구체적인 모습이나 상호 접근방법을 언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민족을 정치적 관계를 떠나 매우 정념적이고 순수한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어 문제라고 지적했다. 송 교수의 민족은 윤리적인 에토스로 가득 차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 내용도 없는 것과 똑같다는 것인데, 이런 지적은 송 교수의 글에 입장과 결단이 결여돼 있다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오히려 민족을 논하는 자리에서 그는 오늘날 통일을 위해 필요한 것은 내용없는 민족공동체에 대한 인식강화가 아니라 민족담론에 민주주의 개념을 수혈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직 남한과 북한이 각각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때 서로의 차이를 좁혀 '동시성과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가능해진다는 것. 체제적·경제적·문화적 격차를 극복할 수 있는 국가간의 매개물은 '민주주의'밖에 없다는 탈민족적 민주주의가 이 교수의 결론이다. 여기서 통일은 조건부 희망으로 객관화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송 교수는 검찰조사로 피곤한지 "술자리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넘기는 바람에 흐지부지돼 아쉬웠다.

다른 발제자들도 송 교수와 같은 차원의 민족의 상황, 역할론을 폈다. 이삼열 교수는 오늘날 한반도가 처한 상황을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적 민족공동체적 통일론과 북한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민족통일론"으로 대비시키고, 이 딜레마를 "평화적 민족주의를 지향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지론을 펼쳤다. 하지만 박정순 교수는 이 교수의 정세분석이 너무 이분법적이고, 햇볕정책 같은 현실요건들이 지속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한 평화적 민족주의는 "현실 타협주의, 현실 편의주의, 현상 고착주의, 냉혹한 상호불간섭주의로 빠질 위험성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교수의 논의가 동아시아와 구미 열강과의 관계와 역할을 별로 고려하지 않은 "민족 내부의 평화주의"라고 비판의 강도도 높였다. 하지만 이 교수는 현실적 평화필요성을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를 들어가며 실감나게 변호했다.

사회과학담론의 재탕 수준

한편 홍윤기 교수는 김학준 사장의 발제가 "세계화의 지형 속에서 한미·남북관계가 어떻게 엇갈리는지 현실적인 세력논리를 복합적으로 제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현실에 매몰돼 논의가 제자리를 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윤건차 교수의 발제문은 기대한 만큼 새로운 내용은 없었고, 일본국적을 가진 한민족인, 즉 경계인으로서 그가 살아온 내력과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불가피성을 주장했다. 그는 한국학자들에게 '민족'보다는 '내셔널리즘'이란 좀더 포괄적 용어를 택해야 세계적 내셔널리즘 논의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이날 자리는 분명 철학적으로 민족 문제를 푸는 자리였다. 하지만 과연 사회과학적 민족담론과 얼마나 명확한 차이를 보여줬는지는 의문이다. 복잡한 정세분석과 약간의 아이디어는 모두 사회과학적 논의의 재탕 수준이었고, 철학적 논의는 "이렇게 하자, 뭐가 필요하다"는 식의 소망적 표현이 주류를 이뤄 아쉬운 감이 있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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