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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7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7
  • 김용준
  • 승인 2003.10.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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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마침내 장준하와 의기투합하다

내 연대의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일 중 하나는 '어떻게 장준하 사상계사 사장이 장면정권 하에서 국토건설부장이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심지어는 장준하의 일생일대의 실수가 장면정권에 가담했던 일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나 자신도 이 점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미 소개한 박경수님의 '장준하'라는 책은 이 궁금증을 풀어준다.

'사상계'의 필자동인 중의 한 사람인 김영선이라는 사람으로 인하여 촉발된 일이다. 1960년 8월에 장면정권이 출범하면서 재무장관이 된 김영선은 어느날 당시의 사상계사에 나타나서 장면정부는 범국민운동의 형식으로 국토건설사업을 추진하려 하는데 장사장이 이 일을 좀 맡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앞으로 정부 조직법을 고쳐서 무임소장관 소속으로 하겠다는 정부방침까지도 귀띔해주는 것이었다.
이때 장준하님의 대꾸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김의원도 권력을 잡으시니 뭔가 달라지는 거 아니오?…내게는 '사상계'가 곧 장준하고 장준하가 곧 '사상계'인데 '사상계'가 장준하보다 위입니다.…국민운동차원의 국토개발사업이라면 관 주도로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관민이 서로 반목하여 온 터라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관에서 앞장서면 관의 군림이라는 선입견이 들고 또한 실제로 강제성을 띄기 마련이기 때문에 좋은 실효를 거두지 못한단 말입니다.>

이상의 장준하의 말에서 그의 투철한 인생관의 편모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당시 김영선 장관 요청을 거절하면서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민간 차원의 국민운동을 할 사람은 찾으면 얼마든지 있겠지만 '사상계'는 자기 빼놓고는 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에 매달릴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당시 한국은행 부총재이며 사상계 편집위원이기도 한 유창순 및 후에 상공부장관이 되는 태완선까지 동원하여 장준하를 설득하기에 이른다.

당시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의 발행부수가 8만부 선에 머물고 있었는데 '사상계'의 발행부수가 항상 5만부 선을 넘게 유지되고 있었고 4·19 전후에서는 10만부 선을 육박하고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사상계'의 위력을 능히 가늠할만 하다. 그런데 당시 장준하 사장에게는 많은 부채가 있었다는 것이다. 장준하 사장은 전후 사정을 감안해 볼 때 결코 째째한 수전노는 아니었고 우선 돈을 써야 할 일이 있으면 서슴치 않고 쓰는 사람이었다. 예컨데 어느 교수가 쌀이 떨어졌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대로 지나는 성격이 못되어서 쌀 한 가마를 사서 보내야만 하는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저녁 때 집필자 교수들이 어슬렁 들리기라도 하면 장사장은 그들을 그대로 보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요즘 식으로 포장마차에 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비싼 한정식 집에서 대접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은 함석헌 선생님도 "대관절 이렇게들 먹어대면서 어떻게 '사상계'를 꾸려나가시오?"라고 꾸짖으신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출출해서 술 한잔 마시고 싶어하는 사람을 돈이 없으면 몰라도 어떻게 그냥 돌려보낼 수 있느냐?'라는 말이 그의 변이었다. 기독교의 목사이며 외교관으로서도 많은 활약을 했었던 엄요섭과의 대화에서 장준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어려운 때 막사이사이상을 탄 수상금 전액을 밀린 원고료로 지불했는데 그 후에 다시 원고료를 지불하지 못할 정도로 회사가 어려워졌을 때 원고 청탁을 했더니 많은 교수들의 집필을 꺼려서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영선 장관이 장준하사장에게 국토건설본부 일을 교섭하였던 당시의 사상계사는 미국의 '타임'주간지와 '라이프'월간지의 특약점을 맡고 있었는데, 정권교체와 환율변동으로 엄청난 부채를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도미하기 전 천안농고 시절과 서울대학교 시간강사 시절에 타임지에서 얻은 여러 가지 지식과 또한 타임지를 통한 영어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었던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되면서 장준하라는 인물의 또하나의 편모를 보는 듯 하여 감회가 새로워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나라에 타임과 라이프지가 사상계사를 통해서 보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와 닿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재무장관인 김영선이 그 부채를 담당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바람에 장준하는 혹 떼려다가 더 붙은 격으로 국토건설본부장을 할 수 없이 맡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은 이 때 김영선 장관에게서 장준하의 집을 담보로 대출한 1천만환이라는 돈 때문에 군사학명정부에서 결국은 '부폐언론인'으로 낙인 찍혀 갖은 고초를 겪고 있을 때 장준하는 장면정권시대 국토건설본부에 취직하겠다고 제출한 김종필의 이력서가 자기 책상 서랍속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고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사직전의 '사상계' 사장 장준하는 회사 안에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장준하를 '장준하'의 저자 박경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 사람의 언론 출판인으로서의 그 역할을 차압당한 그였지만 그대로 얌전히 무기력하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 조건반사적 분출 행위로 연설장에 나가 강연으로 응축된 것을 푸는 일이었다…장준하는 이때부터 순식간에 전업 연사처럼 돌변하여 각 대학·정당·사회단체 등에서 주최하는 강연·연설회장에 나가게 된다. 그것은 물론 그가 자청해서 쫓아다니는 것은 아니니, 시대가 마침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니까 억눌릴대로 억눌리고 짓밟힌 시대의 민심이 장준하처럼 턱밑에 칼끝이 닿아 있는데도 눈썹하나 까딱않고 할말을 하는 사람을 도처에서 필요로 했던 것이다.>

바로 이때 함석헌은 귀국한 것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래서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무엇보다 소원이던 인도여행 계획을 취소했지. 그래 돌아와서는 '사상계'의 장준하한테 갔고 사상계사가 주최해서 시민회관에서 그리고 대광학교 운동장에서도 강연을 했는데 그때 사람이 8,9만이나 모였다고 해요. 그게 사회참여의 시작이라면 시작인데 나는 사회참여니 정치참여니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 그러던 중 6·3데모가 터졌지. 이런 때지만 드러누워 있으니 이걸 어떡하지 그러다가 나온 거지요. 그래서 나와서 머리 깎고, 세상이 다 알거나 말거나 나대로 책임을 지는 생각을 하고, 깊이 생각을 해야지 그런 생각에 두 주일 단식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이제 그 다음 한·일 문제가 터지니까 그걸로 또 장준하가 일어서고, 차차 일이 벌어지니까 협력을 안할 수가 없어졌지, 그러고도 정부와 싸우자는 생각이야 어디 했어요? 그 다음 월남파병하고‥(정부에 분노를 느끼고 공화당 정부하고 싸우기를 마음먹은 건) 그건 주로 6·3데모 때문이야. 이럴 수가 있나? 서울대학 구내에 기관총을 들여다 놓았다는데 그거에 제일 분개한거야. 그럴 수가 있나? 지성을 이렇게 짓밟을 수가 있나? 그랬는데 그담 월남파병까지 하는 걸 보고는 아무래도 그대로 있어서는 안되겠다. 해야 되겠다고 해서 그렇게 됐지요.> (전집 4:360∼361)

<내가 내 자신을 봐도 본래 정치적으로 되어 있지 않아요. 아마 생각하는 사람이지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거든요>라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백하는 함석헌은 장준하와 만남으로써 정치 비판의 소리를 높이고 직접 행동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20년 동안 사귀어 보아서 압니다…내가 그를 믿는 것은 부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믿어지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우물우물하게 썩어지고 말 부류의 인간이 아니요 뜻을 품은 사람입니다.…그는 뜻을 품었는데 그 뜻이 영원한 것이고 거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전집 8:231) 후일에 장준하를 애도하는 함 선생님의 글이다. 아마도 이 장준하가 이심전심으로 불러서 함석헌은 모든 여정을 걷어치우고 귀국하였는지도 모른다. 어느날 한국에서 온 신문 보다가 눈물을 훌리면서 조용히 "나 돌아갈래" 한마디 남기고 귀국에 올랐다는 것이다.
워싱톤에서 군사정권의 사꾸라라고 비난을 받던 함석헌의 장준하와 더불은 사자후는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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