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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문화칼럼] 앞뒤가 맞지 않는 인간들의 헛소리
[김희철의 문화칼럼] 앞뒤가 맞지 않는 인간들의 헛소리
  • 교수신문
  • 승인 2020.02.1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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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단편영화 '지리멸렬'

“이 영화에 나오는 각종기관, 회사 등의 실명(實名)은
단지 자연스러운 사실성을 위해 무작위적으로 선택
사용되었을 뿐이며 일체의 주제적, 시사적 의미가
없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이것은 봉준호 감독의 초기작인 단편영화 <지리멸렬>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자막이다. 지리멸렬(支離滅裂)은 “갈가리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는 의미인데 작품의 영문명으로는 ‘INCOHERENCE’라는 단어가 타이틀 컷에 들어가 있다. “앞뒤가 맞지 않다”, “헛소리”라는 의미다. 봉 감독의 눈에는 뭐가 그리 앞뒤가 맞지 않았을까?

 1994년 작인 이 <지리멸렬>은 봉준호 감독이 연세대를 졸업하고 들어간 영화 아카데미에서 16mm 필름으로 만든 작품이다. 세 가지 에피소드들과 에필로그 씬(Scene)으로 구성된 이 옴니버스 영화의 주인공들은 교수, 논설위원, 검사 등 우리 사회에서 흔히 잘나간다는 직업군의 사람들이다. ‘바퀴벌레’라는 소제목을 단 에피소드 1의 이야기는 대학교 캠퍼스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평소 엉큼한 상상을 자주 하는 한 남성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음란 잡지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고 있다가 급하게 강의에 들어간다.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의 강의를 하던 도중 연구실에 깜박 놓고 온 프린트물을 갖다 달라고 한 여학생에게 부탁한다. 학생이 강의실 밖으로 나가고 몇 초 후 교수는 책상 위에 자신이 보던 잡지가 그대로 놓여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수업이고 뭐고 당장 뛰어나가서 학생을 불러세워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학생이 탄 엘리베이터를 놓치고 연구실이 있는 6층까지 층계로 전력 질주하여 잡지를 감추는 데 성공한 교수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 궁색하기 짝이 없다.

에피소드2 ‘골목 밖으로’는 매일 아침 조깅을 하는 중년 남성이 남의 집에 배달되는 우유를 훔쳐먹는 이야기다. 대담하게도 그 집 대문 앞에 앉아 우유를 마시고 있던 중년남은 그때 마침 신문 배달하는 소년이 오자 선심 쓰듯 옆에 있던 새 우유를 소년에게 마시라 권하곤 유유히 사라진다. 배달할 신문들을 옆구리에 낀 채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는데 그 집 가정부가 대문을 열고 나오더니 소년의 머리통을 연달아 쥐어박는다. 졸지에 우유 도둑으로 몰린 것이다. 억울한 신문배달원이 우유를 훔쳐먹은 진범인 중년 남성을 쫓는 골목 장면은 훗날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이 용의자의 뒤를 추격하는 명장면으로 발전했다. 여전히 신문배달원이 우유 도둑이라고 생각하는 가정부는 ‘OO 일보 사절’이라는 종이를 대문 기둥에 붙인다.

 세 번째 에피소드 ‘고통의 밤’은 심야버스에서 졸다가 생판 모르는 동네에 도착한 만취 남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갑자기 대변이 마려운 상황에 놓인 남성은 아파트 단지의 어두운 한구석에서 큰일을 보려고 하다가 관리인 할아버지에게 들키고 만다. 관리인은 남성에게 신문지를 주면서 아파트 지하실에 들어가서 해결하고 그대로 싸서 나오라고 주문한다. “내가 누군 줄 아냐!”고 혼자 격분하던 남성은 결국 지하실로 내려가서 변을 본다. 그런데 이 남성, 자신에게 모욕감을 준 관리인에게 더러운 방법으로 복수하는 치사하고 비겁한 인간이다.

 에필로그에서는 토론회가 나오고 있는 TV 화면을 보여준다. 이 화면은 우유배달 소년이 자는 방의 TV에도, 교수의 제자인 학생의 집에 있는 TV에도, 아파트 관리인의 좁은 사무실에 있는 미니 TV에도, 거리의 스포츠용품점 쇼윈도의 대형 멀티 TV에서도 나온다. 토론의 주제는 “반사회적인 흉악범죄를 통해 우리 사회의 도덕적 문제를 총체적으로 진단해 보는 것”. 일류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교수, OO 일보 논설위원, 검찰의 부장검사가 토론회의 패널로 소개된다. 바로 에피소드 1, 2, 3의 주인공들이다. 패널들은 “공동체 문화가 사라진 우리 사회의 한 단편...”,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의 잘못”, “시민들의 자질구레한 위반사례” 등등을 운운한다. 각각 독립된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헛소리를 떠들고 앉아 있는 모습, 자체가 이 작품으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봉준호 감독은 이야기한다. 인간의 위선을 꼬집는 이 블랙 코미디는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이 많아서 전혀 무겁지 않다. 그게 봉준호 연출의 특기이자 가장 큰 매력이다.

 2020년 2월 10일은 한국영화사뿐만 아니라 세계영화사에 남을 날이 되었다. 미국 영화가 아닌 아시아 영화 <기생충>이 각본상, 작품상, 국제장편영화상, 감독상을 받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전 세계인이 놀라고 수많은 사람이 기뻐하는 날이었다. 그야말로 봉준호 감독이 서양 영화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거장이 된 순간이었다.

 자본주의 상업영화의 최전선에 서 있지만, 봉준호 감독의 출발은 독립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초기작 <백색인>, <지리멸렬>은 안내상, 김뢰하 등 당시 무명이었던 배우들, 그리고 무명의 스텝들과 호흡을 맞췄던 지극히 독립 영화스러운 작품들이었다. 그는 영화를 위해서 작품을 만들었지, 영화제에 납품하기 위해 만들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출발하여 사회적인 메시지도 담으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계속해서 실험해보고 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실험정신은 독립영화의 기본 태도다.

 봉준호가 이룩한 쾌거는 너무나 기쁘고 축하할 일이다. 그것과 더불어 기억해야 할 것은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지키다가 병마와 싸우게 된 사람들, 심지어 목숨까지 잃은 수많은 독립영화인들이다. 한국의 영화산업이 발전하면서 한국의 독립영화도 함께 커왔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발전한 경제의 부작용에 시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독립영화는 여러 한계와 문제점에 봉착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봉준호의 성공이 진정한 한국영화의 발전으로 이어지려면 위태롭고 처참한 독립영화의 현실들을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그것이 봉준호의 성과를 소수의 가진 자들이 아닌 우리 모두의 성과로 가져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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