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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5- 블레이크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5- 블레이크
  • 교수신문
  • 승인 2020.02.03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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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를 지은 아나키스트 시인?
영국을 비롯하여 영연방 여러 나라에서 애국가로 불리는 노래는 〈하느님, 여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이다. 일본의 <천황만세>와 같은 내용의 노래여서 나는 참으로 싫어하는데 영국인은 물론 그 식민지였던 영연방 게다가 한국 같은 나라에서도 즐겨 부른다니 기가 차다. 그런데 잉글랜드에서는 제2의 애국가라고 하는 것이 《예루살렘》이라는 제목의 다음 노래다.

먼 옛날 저들의 발길은
잉글랜드의 푸른 산 위를 거닐었나?
거룩하신 주의 어린양이
잉글랜드의 기쁨의 들판 위에 보였나!

그 성스러운 얼굴이
우리의 구름 낀 언덕에 빛을 비추셨나?
정말로 예루살렘이 이 땅 위에,
이 어두운 사탄의 맷돌들 사이에 세워졌나?

금빛으로 불타는 나의 활을 가져오라
나의 염원을 품은 화살을 가져오라
나의 창을 가져오라, 오 구름이 펼쳐지누나!
내 불의 전차를 가져오라!

나는 영혼의 싸움을 멈추지 않으리,
나의 검도 내 손에서 잠들게 하지 않으리
우리가 잉글랜드의 푸르고 즐거운 땅에
예루살렘을 세울 때까지

윌리엄 블레이크가 그린 아내 캐롤라인 블레이크(1805)
윌리엄 블레이크가 그린 아내 캐롤라인 블레이크(1805)

3연에 나오는 ‘불의 전차’라는 말은 올림픽 영화의 제목이 되었고, 온갖 어려움을 겪고 마침내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스포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위 시에 곡을 붙인 합창곡이 장엄하게 울려 퍼져 감동을 주지만, 이 시는 산업혁명 이후 잉글랜드의 물질적 타락을 개탄하면서 ‘불의 전차’를 타고 영혼이 혁명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근대화로 인해 헬조선이 되었으니 그걸 다 때려 부순 뒤에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식이다.  

이 시는 1808년에 윌리엄 블레이크가 예언서 《밀턴》에 실은 <먼 옛날 저들의 발길은>이라는 제목의 시인데 한 세기가 지난 20세기에 와서 애국가처럼 불려졌다. 국가를 부정한 아나키스트 시인의 시가 애국가로 불린다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영국을 갖가지 기이한 꼴의 괴물로 묘사한 그의 아나키 그림이 영국을 대표하는 테이트 브리튼 메인홀의 윌리엄 터너 방 입구에 걸려있고, 2002년 영국 BBC의 TV 프로그램에서 위대한 영국인 100인 중 38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우리도 친일 논쟁이 있는 지금의 애국가를 버리고 헬조선을 부수자는 내용의 새 애국가를 만들어보면, 20세기 초의 영국이 《예루살렘》을 애국가로 부르며 대영제국을 만들었듯이 세계를 지배하는 대한제국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 않는가? 특히 성조기와 함께 이스라엘 국기를 흔드는 태극기부대야말로 이 땅에 새로운 예루살렘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니 그런 대한제국의 애국가 만드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블레이크의 삶
블레이크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은 위생과 의료 지식의 개선으로 기대 수명이 증가하기는 했지만 인구 증가, 수확량 감소 및 전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고아와 빈곤층의 아동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견습생으로 팔렸고, 자선기관은 착취를 정당화하는 곳으로 타락했다. 하층민의 어린이는 굴뚝 청소부로 시작하여 매춘과 빈곤이라는 운명에 평생을 허덕였다. 그 비참한 상황은 헬영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블레이크 부부 묘비ⓒTarquin Binary/wikipedia|CC BY-SA 2.5
블레이크 부부 묘비
ⓒTarquin Binary/wikipedia|CC BY-SA 2.5

다행히 블레이크는 그런 고통 속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1757년 런던에서 비국교도인 아일랜드 출신의 잡화상 중산층 가정의 일곱 아이들 중 셋째로 태어난 그가 25년을 산 생가와 당시의 주변 건물들은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번화가인 소호(Soho)의 16층 빌딩 계단 벽에 그의 생가가 있었음을 알리는 허름한 안내판이 붙어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아나키스트 치고는 죽어서도 대접을 받는 편에 속한다. 물론 그런 대접도 최근에 주어진 것이고 70 평생, 3년의 시골생활을 빼고는 줄곧 런던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광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런 취급을 받은 이유는 그의 시나 그림이 난해하고 신비로웠기 때문인데, 그 요인 중에는 가족이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의 사후세계에 대한 신비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블레이크가 어릴 때부터 다양한 환영을 경험한 데 있다. 괴테가 《파우스트》의 모델로 삼았던 스베덴보리는 한국 교회에서 이단으로 몰렸으나, 최근 그의 책 《천국은 있다》가 베스트셀러가 됨에 따라 주목을 받았다.  

블레이크는 부모의 영향으로 이미 영국교회는 물론 모든 형태의 조직화된 종교에 적대적이면서도 성서에 대한 믿음은 헌신적이어서 계몽주의적 이신론이나 무신론은 물론이고 유물론적 물질주의를 배척한 점에서 당시의 진보주의자들과 달랐다. 그러나 1775년부터 시작된 미국독립혁명과 함께 1789년의 프랑스혁명을 비롯하여 영국에서 벌어진 갖가지 폭동이 그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친 점은 당대의 진보주의자들과 공통된 점이었다. 그런 불온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영국의 엘리트 코스인 명문 사립학교의 교육도 받지 않고 집에서 어머니에게 기본교육을 받은 뒤 열 살부터 미술학교에 다녔고, 열네 살부터는 7년 동안 판각사(engraver)의 도제로 수련했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21세가 된 1778년 당시 막 설립된 왕립 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초대 원장인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 1723~1792)가 주장한 ‘보편적 진리’와 ‘보편적 미’의 추구라는 일반화는 바보가 되는 것인 반면, 개성적인 특수화는 장점을 구별하는 유일한 특징이라고 생각했고, 레이놀즈의 화려하고 세련된 유화보다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의 고전적이고 정확한 그림을 더 좋아했다. 그 뒤로 블레이크는 독자적인 시를 썼지만 시인으로 알려지거나 시로 돈을 번 적이 없고 평생 판각사로 일해 생계를 이었다.

1782년 여름에 블레이크는 글을 모르는 여성(Catherine Sophia Blake, 1762~1831)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을 했고, 그녀에게 읽고 쓰기와 판각을 가르쳐 평생의 파트너이자 동료로 함께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1783년에 첫 시집을 내고 1년 뒤인 1784년에 그는 친구들과 함께 인쇄소를 차렸다. 그곳에는 페인, 고드윈, 워즈워스, 울스턴크래프트를 비롯하여 당시의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모여 토론을 하고 혁명에 대한 꿈을 키웠으나, 로베스피에르의 등장 이후 프랑스가 테러 통치로 변하자 블레이크는 절망했고 다른 혁명론자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울스턴크래프트의 고통과 투쟁을 묘사한 감동적인 시 <메리>를 쓰고, 페인과는 평생의 친구로 지냈다. 1792년에 페인이 《인권》을 발표한 전후로 진보주의자들을 억압하는 보안체제가 강화되자 블레이크가 페인을 도와 도망치게 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 뒤 블레이크는 3년간 시골에서 살다가 1804년 런던으로 돌아와 그의 대표작인 《예루살렘》을 1820년까지 썼고, 몇 차례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1827년 생애 마지막 날, 블레이크는 눈물을 글썽이는 부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그림을 끝낸 뒤에 찬송가를 부르고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런던의 어느 공동표지에 대중 모금으로 건립된 다니엘 디포의 거창한 기념비에서 두세 발자국 떨어진 곳에 블레이크 부부의 묘비가 있다. 초라하지만 단아하게 서 있는 작은 묘비의 모습을 보면 지금도 대영제국의 상징인 《로빈스 크루소》와 대척점에 선 블레이크의 《예루살렘》이 그 무덤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블레이크의 아나키즘
블레이크의 《예루살렘》이 애국가로 불리는 것 이상으로 이상한 일은 영국의 지식을 상징하는 대영도서관의 입구에 놓인 거대한 뉴턴상이 블레이크의 그림에서 나온 것인데, 블레이크는 그 뉴턴을 지식의 상징이 아니라 악마의 상징으로 경멸했다는 점이다. 그가 이성을 죽음의 나무, 예술을 생명의 나무로 대비했을 때 그 이성의 상징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각각 대표하는 뉴턴과 로크였다. 블레이크의 뉴턴은 컴퍼스로 사용하고 있는데, 블레이크의 그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면 그 컴퍼스가 과학의 척도로 예찬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블레이크에게 컴퍼스는 그야말로 악마의 비밀을 상징하는 도구였다. 그것이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을 낳았다. 《예루살렘》에서 그가 노래한 로크와 뉴턴 비판을 들어보자.

그곳에서 로크의 베틀을 본다 그걸로 짠 더러운 직물조각이
뉴턴의 물레로 씻긴 그 시커먼 직물은
무섭게 소용돌이치며 모든 나라에 포개어진다,
수많은 바퀴의 잔혹한 노동을 나는 본다
독재의 톱니바퀴가 달린 서로 구속하며 바퀴 없는 바퀴가 강제로 돌아간다.

이처럼 기계바퀴가 서로 극렬하게 대립하면서 돌아가는 공장에서는 모든 것이 마비상태에서 이성에 의존하고 상상력을 포기하게 만든다고 블레이크는 비판한다. 그 잔혹하고 무의미한 노동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영국에서 왔다. 블레이크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폐해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그들 대신에 복잡한 바퀴는 바퀴 없는 바퀴를 발명한다,
생산물은 청춘을 혼란시키고 영국에서 노동으로 구속한다,
밤낮으로 영원히 갈아댄다.
시간마다 놋쇠와 철을 닦는 고된 임무!
그 사용법도 모르고 그들은 지혜의 나날을 낭비한다. 

에두아르도 파올로치가 만든 대영도서관 입구 뉴턴상ⓒEduardo Paolozziy/wikipedia|CC BY-SA 4.0
에두아르도 파올로치가 만든 대영도서관 입구 뉴턴상
ⓒEduardo Paolozziy/wikipedia|CC BY-SA 4.0

블레이크는 이러한 산업사회가 노예처럼 일하는 노동자와 함께 그들을 착취하는 탐식가 계급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대영제국의 기계공장에서 벌어지는 노예와 같은 강제노동이 제국주의 침략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국제적으로는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에 큰 영향을 받았고, 국내적으로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지옥 같은 영국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비판적으로 바라본 블레이크는 정치, 경제, 사회만이 아니라 결혼, 교육, 종교(기독교) 등의 모든 제도적 장치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제기했다. 특히 법은 인간의 잠재적 신성을 완전히 가리는 것으로 인간의 죄를 강조한다고 비판했다. 블레이크는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영향이 영국에 미쳐 영국이 개혁되기를 간절히 열망하였으나 영국에서는 피트 수상의 보수적인 정책이 더 심화되기만 하여 블레이크는 그런 현실에 대해 더욱 좌절했다. 그의 현실 부정의 강도는 그가 꿈꾸는 이상의 강도와 맞물렸다. ‘순수’의 강도가 클수록 ‘현실’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세지고, ‘천국’에 대한 열망이 클수록 ‘지옥’에 대한 환멸의 강도가 커졌다.
《예루살렘》은 영불전쟁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영국인의 애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도 담았음을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너의 부드러운 가족 사랑인가
네 가족만을 키우고
그 밖의 모든 세계는 파괴하는
너의 잔인한 가부장적 오만

인간의 최악의 적은
자신의 집과 가족
자기 법을 저주로 만들면
자기 법에 의해 반드시 죽는다.

블레이크는 초기 작품, 특히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독단적 종교와 부정적 권위주의 신에 대해 항의했다. 《밀턴》이나 《예루살렘》과 같은 후기의 작품에서 블레이크는 자기희생과 용서로 인류에 대한 독특한 비전을 부여하면서도 전통 종교의 견고하고 병적인 권위주의에 대한 초기의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나아가 군주제를 무책임한 중상주의로 대체했다고 믿은 블레이크는 계급적 권력의 남용에 대한 반란의 태도를 일관되게 구현하고 무의미한 전쟁과 산업혁명의 역효과에 대해 우려하며 노예제도는 물론 그 현대판인 공장노동에도 반대했다. 그런 공장노동에 대립하는 것이 블레이크의 수작업에 의한 판화였다. 그 작업으로 인해 그는 광인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예루살렘》에서 묘사한 시인 로스의 대장장이 작업처럼 그것은 소박하면서도 강렬했다.

이성의 철학과 수학의 논증은
쾌락과 애정의 흥분상태에서 분열된다,
두 개의 대립이 분노와 혈투로 다투는 것을
로스는 철침 위에 올려놓고 끝없이 망치질한다,
석재와 목재를 올려놓고 세게 내려친다,
죽음의 세계로부터 생명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위대한 붉은 용과 빛의 여인(1803-1805)
위대한 붉은 용과 빛의 여인(1803-1805)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의 세계에서 고독하게 동판화를 새기며 시를 쓰는 것은 “죽음의 세계로부터 생명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블레이크의 창조적이고 주체적이며 자발적인 삶이었다. 따라서 에덴에서는 바퀴가 “바퀴 속의 바퀴로 조화와 평화로 자유롭게 회전한다.” 그것을 위해 시인은 자신의 위대한 임무를 버리고 쉴 수 없다. 그 임무란 “영원의 세계를 열어서, 내면 깊이 영원을 통찰하는 정신의 세계를 볼 수 있는 필멸의 시력을 열어서, 인간의 상상력을 신의 품속에서 확장하는 것이다.” 블레이크는 물리적 전쟁도 과학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추구하는 지성의 전쟁에 의해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블레이크를 비롯하여 워즈워스나 콜리지 같은 당대 시인들의 공감과 찬양을 받았던 프랑스 혁명이 그 본래의 뜻과는 어긋나게도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결국은 그를 황제로 받아들여야 하게 되었고 이어 터진 영불전쟁을 비롯한 모든 불길한 변화를 블레이크는 다가올 묵시록의 전조로 보았다. 나아가 당대를 지배한 압제자들의 폭정, 위선에 가득한 종교, 기계적 세계관을 추종하는 과학주의 등은 새로운 신앙에 근거한 상상력에 의해 극복해야만 할 오류로 생각했다.

 

블레이크의 영향과 평가
최근에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고드윈과 함께 블레이크를 현대 아나키즘의 시조나 창시자로 꼽지만 이는 그 두 사람이 태어난 영국에서도 반드시 일반적인 견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를 중시하는 아나키스트들 중에는, 고드윈과 달리 블레이크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믿고 자연에 대한 “전체적 접근”을 했다는 이유에서 머레이 북친과 같은 수준의 생태 아나키스트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블레이크가 20세기의 북친과 같은 정도의 생태위기를 심각하게 논의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도리어 기독교 아나키스트로 보는 것이 적합할 것으로 본다.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블레이크

그럼에도 그를 여전히 신비로운 낭만파 시인이자 화가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고, 그런 점에서 그의 영향력은 이미 19세기부터 뚜렷이 나타났다. 특히 윌리엄 모리스나 가브리엘 로세티와 같은 19세기 후반의 라파엘 전파의 미술과 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고, 20세기에는 예이츠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블레이크의 사상은 프로이트나 융과 같은 정신분석가의 무의식에 대한 생각과도 통했다.

20세기 전반의 초현실주의 예술은 물론 그레이엄 서덜랜드와 같은 현대 화가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스승이었다. 그의 시는 벤자민 브리튼과 랄프 본 윌리엄스와 같은 영국의 여러 작곡가들에 의해 작곡되었다. 블레이크는 앨런 긴즈버그와 같은 1950년대의 비트문화와 1960년대의 반문화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작곡가이자 가수인 밥 딜런이나 짐 모리슨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블레이크는 단테의 《신곡》에 그린 삽화로도 유명하지만, 성서 모티프의 악마적 그림들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가령 스릴러 영화 <한니발> 시리즈를 리메이크한 드라마 <한니발>에서 한니발의 추종자, 달라하이드의 등문신은 블레이크의 작품 <위대한 붉은 용과 태양을 입은 여인>(1803~1805)을 그대로 새긴 것이었다. 블레이크는 살아생전에는 그림으로도 시로도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20세기 들어 낭만주의가 새롭게 주목 받으며 예술사적 가치를 인정받았고, 드라마가 그의 그림을 조명했듯이 문학과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시와 그림을 적극적으로 소환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아이폰을 출시한 직후인 2007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순수한 반과학?반이성주의자인 블레이크의 시에서 창의적 영감을 얻곤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블레이크가 살아있다면 과연 등문신을 하고 아이폰을 사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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