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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사회학(05) 한국형 천민 자본주의의 쇼케이스
세속의 사회학(05) 한국형 천민 자본주의의 쇼케이스
  • 교수신문
  • 승인 2020.02.03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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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아레나』|저자 최나욱 |에이도스 |페이지 192

제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해도 한 개인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은 제한적이다. 그래서 책이 있다. 우리는 책을 통해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을 접할 수 있다. 게다가 책은 때로 직접경험을 통해 얻은 앎을 능가하는 대상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로 우리를 이끈다. 책에는 경험이 글로 쓰일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바람직한 변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글 쓰는 사람의 성찰을 통해 체험의 조야함이 논리적 냉정함을 겸비한 체계로 전환되지 않으면 체험은 문장으로 옮겨질 수 없다. 책에 숨어 있는 이 변환과정의 미덕 덕택에 책을 읽는 우리 독자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대상의 진실에 가깝게 갈 수 있다. 

물론 나도 클럽에 가본 적은 있으나, 클럽에 가보지 않은 지 혹은 못 한지 수십 년이 지났다. 클럽은 내가 경험하지 못하는 세상이기에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하지만 의외로 클럽을 간접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은 흔하지 않다. 몇 가지 이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클럽을 늘 들락거리는 이른바 ‘죽돌이’ ‘죽순이’는 클럽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클럽에 대해 글을 굳이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미 도덕적인 판단을 내려 부킹과 원나잇 스탠드가 난무하는 클럽은 너무 타락한 공간이라 책으로 담아서는 안 된다고 결론지었을 수도 있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틀로 바라본 세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세상은 ‘정치적 올바름’의 당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클럽은 ‘정치적 올바름’의 틀로는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문제적 공간이지만, 실제로 클럽은 존재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이 클럽을 이용하고 있다.

<클럽 아레나>는 실제로 존재했던 서울의 강남에 있는 클럽이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문을 닫기 전까지 ‘강남형’ 클럽의 대표 주자였다. 가수 승리의 문제적 행동에 대한 언론 보도를 통해 잘 알려진 <클럽 버닝썬>의 벤치 마킹 대상이 <클럽 아레나>라고 한다. 버닝썬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책으로 옮겨진 <클럽 아레나>를 읽어보면 버닝썬 사건이 왜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서울의 강남에만 클럽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강남의 클럽은 같은 서울에서도 홍대나 이태원의 클럽과는 다르다. 홍대나 이태원의 클럽에서는 음악과 춤이 중요한 요소인데 강남의 클럽에서 음악과 춤은 절대적이지 않다. <클럽 아레나>가 흥한 이유는 <클럽 아레나>에 뛰어난 디제이가 있었기 때문도, 내부 시설이 출중해서도 아니다. <클럽 아레나>는 ‘정치적 올바름’의 눈으로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고 없어져야만 하는 그 어떤 ‘욕망’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시함으로써 성공했다.

아무나 클럽 아레나에 들어가지 못한다. 입장거부(클러버의 용어로는 ‘입밴’이라고 한다)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입밴’은 클럽의 입구에서 가드에 의해 결정된다, 손님이 여자라면 ‘입밴’의 기준은 암묵적으로 외모가 된다. 외모라는 암묵적 기준은 남자에게도 적용되지만, 환영받는 남자 손님은 외모가 아니라 재력으로 ‘입밴’의 장벽을 넘는 사람이다, 외모가 떨어지더라도 남자 손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을 제시하고 ‘비딩(bidding)’하여 테이블을 차지하면 된다. 클럽 아레나는 이로써 젠더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이룬다.

클럽 아레나의 ‘입밴’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정책에 의해 암묵적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입밴’ 당한 사람은 억울해하지만 클럽 아레나에 입장하려는 사람 중 누구도 이 부당함을 문제 삼지 않는다. ‘입밴’ 당하지 않은 사람은 은근히 자랑스러워한다.

클럽 안에서 벌어지는 일 또한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보자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얼평’(얼굴평가)은 천연덕스럽게 이뤄지고 사람은 철저하게 동원할 수 있는 재력에 의해 테이블을 차지한 사람과 스탠딩 해야 하는 사람으로 되고 분류되고 분리된다.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에서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치와 기준은 클럽 아레나에서는 실종된다. 클럽 아레나는 모두가 공식적으로는 부정하는 “천민 자본주의, 외모 지상주의, 여성 혐오” 등과 같은 태도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그것이 자연의 질서라도 되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벌어지는 곳이다. 강남으로 표상되는 한국 자본주의의 민낯이 여기 있다. 당연히 읽으면 불편하다. 그런데 이런 곳이 실제로 있다. 책에 묘사된 클럽 아레나의 풍경이 역겹다면, 클럽 아레나를 품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클럽 아레나를 클럽 버닝썬 등으로 증식시키고 있는 천민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몇 배 더 강한 거부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노명우 교수 아주대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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