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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영혼, 진보의 품격
보수의 영혼, 진보의 품격
  • 교수신문
  • 승인 2020.01.31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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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고문
이상국 편집고문

진보를 표방한 '진영'의 정부가 기대한 것에 비해 현실적인 국가경영에 서투르고 이를 만회하려 거칠게 나가다 보니, 진보에 대해 막연히 가졌던 호감들이 꽤 떨어져 나갔다. 중도의 이탈이라고 부르는 건, 진보가 지녔다고 믿었던 정의와 공정 같은 덕목들이 내로남불 방식으로 작동하는 공격적 논리에 불과했다는 각성으로 돌아오면서 생겨난 '호감 철회'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한국을 두 동강 낸 듯 맹렬한 파열음을 냈던 '진영논리'는, 좀 더 정밀하게 말하면 이 땅에서 권력을 잡고 혁신을 수행해나가던 쪽의 급작스런 세불리를 만회하려는 지원사격의 포성이 빚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관 후보자의 인사검증 과정의 보도에서 등장한 몇 가지 문제들이 중대한 범법으로 인식되면서 검찰이 수사를 하기 시작했고, 여권은 검찰의 이런 행위 전체를 '검찰개혁'을 저지하거나 방해하려는 개혁대상의 역공으로 읽었다.


검찰개혁에 대한 반기로 보는 '패러다임'으로 이 문제를 읽기 시작하면서, 장관 후보자의 개인적 혐의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거나 검찰에 의해 과장된 것으로 해석되기 시작한다. 범죄 혐의와 수사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검찰 신뢰성'을 타격하는 이런 구도를 지원사격한 것이 진보진영의 '민의'를 표출한 서초동 시위다.

더 많은 사람이 모였던 광화문 시위는, 진보 정부가 2년여 동안 보여준 여러 가지 정책과 소신에 대해 비판하던 사람들과 진보 정부의 핵심인사이던 조국에게서 드러난 비리를 용납해선 안 된다는 사람들을 비롯해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기 어려운 매우 복잡한 집단의 집회였다. 이들은 정확히 말하면 보수 진영이 아니라, 문재인 정권에 대한 '반대'만을 공유점으로 지닌 무리들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도 달랐으며 시위를 통해 기대하는 것도 달랐다. 이상하게 논리를 뒤바꾼 듯한 서초동의 세과시를 압도하기 위해 모인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모였다 하면 반목하는 극한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한국이 지금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을 반대한다고 '보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지는 깊이 돌이켜 보지 않았다. 국가 권력을 집행하는 진보 정부가 기대치의 품격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해선 일정하게 공감할 수 있지만, 그 행보를 날마다 헐뜯고 조롱하며 비판의 목소리만을 키워온 쪽이 '보수의 자질'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선 진지하게 반성하는 말들을 만난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덜컥 4월 총선이 다가와 있다. 지금의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야당들의 '뇌구조'를 불심검문했을 때 지향점이 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정당이 과연 있는가. 그들이 '보수'라면 보수의 어떤 면모를 실천해왔는가. 정체불명의 정당이 진보정권의 파행에 대한 반사이익으로 권력을 쟁취하겠다고 꿈꾸는 '정치구도'는 이 나라를 더 위험스럽게 만든다. 반문재인 진영으로 뭉쳐, 숫자의 우위를 이뤄 진보정부를 전복하고자 하는 의욕 또한, 구태의 재연만을 연상케 할 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정체성의 선명함마저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 '나머지 정치군'들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문정부가 '자유'라는 개념이 만들어놓은 부작용이라 할 수 있는 '불공정 세상'을 의식적으로 바로잡기 위해 '자유'라는 단어를 소극적으로 사용하는 반면, 당명에다가 '자유'라는 말을 붙인 자유한국당은 현재로선 '보수'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아까운 무개념 정당에 가깝다. 지난 박근혜 정권의 전복 과정에서 입었던 트라우마와 분노를 요격미사일처럼 적재하여 이 정부의 가는 길마다 치명적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전략을 쓴 것밖에는 뚜렷한 것이 없다.


이런 이미지만 생겨있는 까닭은, 선제적이고 구체적인 정책과 비전을 내놓아 여당과의 건전한 경쟁을 자극하고 야당으로서의 적극적 역할을 해내는 면모를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박근혜 메시아가 다시 돌아와, 스스로 발휘한 집착적 충성도를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무리까지 그 속에 끼어있는지도 모른다. 정책과 비전이 나오지 않은 까닭은, 그들이 워낙 큰 충격에서 출발했기 때문인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정신'이나 '신념'으로 뭉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권력을 흔드는 권력으로 군림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수가 아니라, 적폐의 향수를 느끼는 수구이기만 했다.


그들에게 보수의 영혼을 요구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보수는 산업혁명이 낳은 '정신적 기틀'이다. 즉 자유경쟁체제와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세상을 운영할 수 있다는 믿음을 체계화한 것이 보수다. 보수는 기득권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의 기틀을 지킴으로써 세상을 더욱 살기 좋게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뜻한다.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정의와 공정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좀 더 실감 나는 가치관으로 만들어놓은 말이다. 진보는 평등을 정신적 기틀로 삼는다. 보수가 이뤄놓은 경제적 번영 물밑에 불평등이 심화한 현실을 비판하면서, 진보가 태동했기 때문이다. 자유는 많은 것을 이뤘지만,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를 빚었고 그것이 고질적인 신종 계급사회를 낳았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정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 '진보'의 머리띠를 두른 이들이다. 그들은, 무한 자유의 일부를 제한하고 강제 조정함으로써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왔다.


한국 사회도 전쟁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자본주의를 번성시켜 왔지만, 그 번성의 이면에 심각한 불평등과 불공정을 키웠다.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기득권층의 결탁으로 심화되고 고착화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 사실이다. 진보정부에게 민심이 옮겨간 까닭도 여기에 있다. 박근혜정부의 정치적 실패에서 비롯되었지만, 공정한 사회에 대한 염원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권이 바뀐 이후, 진보정권 아래의 야당이 된 전 집권층 중심의 정치세력은 아마도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 같다. 정부를 필사적으로 비판하면서도, 그 근원이 무엇인지 그 해법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그래서 자신의 정치적 비전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고민해볼 겨를이 없었다.


문재인 정부가 보여준 '진보적 정치학'의 낯설고 심각한 문제는, 여야를 동반자로 인식하는 민주적 정치의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거기에 '시장'을 오로지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장 몰이해'의 관점도 치명적이다. 또 자유라는 것을 제한하거나 수정하는 것에 대해 신중하지 않다는 점도 특징을 이룬다. 여기서 진보의 반시장적인 정책과 독선적인 정치 행보가 나오는 셈이다.


보수의 영혼은 간단히 말해서 '자유'이다. 자유가 지닌 장점들을 살려내는 것뿐이다. 반문재인을 외치는 오합지졸의 정치에는 문제의 근본을 읽고 대안의 정책을 제시하면서 선도해나가는 주체성이 없다. 그리고 더욱 '자유'가 필요해지는 미래 디지털 사회의 다양한 선택들을 지지하고 선도하는 안목도 두뇌도 행동도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름만 보수이지 실은 영혼 없는 좀비다. 좀비를 통합하면 숫자만 많은 좀비가 될 뿐이다. 기능은 '정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철학자 최진석 교수는 말했다. 그런 정당이 승리하면 더 무섭다. 진보가 괴물로 나아가고 있다면 그걸 물어뜯는 보수는 좀비로 연명해나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보라.

이상국 시인/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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