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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열전 - 13 메리 셸리
박홍규의 아나키스트열전 - 13 메리 셸리
  • 교수신문
  • 승인 2020.01.12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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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창부수… 아나키즘 운동가 퍼시바시에 걸맞는 단짝. 아내도 아나키스트
메리 셸리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나에게 메리 셸리는 아나키스트다. 그러나 메리 셸리를 아나키스트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는 없으니 당연히 의문을 가질 분들이 많을 것 같다. 특히 그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페미니즘 소설로 보는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오래전부터 그 소설을 아나키즘 소설로 읽어왔다. 나는 그 소설만이 아니라 스위프트, 톨스토이, 카프카, 헤세, 오웰의 소설 등도 아나키즘 소설로 읽었고, 그런 관점에서 그 작품들을 논한 책들을 썼다. 아버지 고드윈의 딸인 메리 셸리의 경우, 그런 작가들보다 더욱 아나키스트일 가능성이 높다. <프랑켄슈타인>의 표지 다음 쪽에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를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렇게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어머니 울스턴크래프트를 잇는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울스턴크래프트도 아나키스트로 보며 그녀의 페미니즘도 기본적으로 아나키즘에서 나온다고 본다. 권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즘이 국가권력을 최대의 적으로 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사실은 국가권력 이상으로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무서운 일상의 적은 가부장제 하의 부모, 특히 아버지이자 남편이라는 남성이다.  

이렇게 보는 나를 두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비슷한 말이지만 전혀 다르게 사용되는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 눈에는 소크라테스만 보인다.” 그러나 나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돼지가 더 맞다. 내가 이미 앞 연재에서 아나키스트로 소개한 붓다나 예수 등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할 분들이 계시겠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아나키즘 소설이라고 본 점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는 독자들이 있을법하다. 스페인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돈키호테>를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독법이 지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를 아나키즘 입장에서 쓴 뒤에 나는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마찬가지 입장에서 쓸 계획이었지만 고민 고민 끝에 결국 포기했었다. 나는 일찍부터 그렇게 보았지만 한국의 수많은 영문학자들 중에서 그렇게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스위프트에 대해 아나키스트 운운한다면 그야말로 인간이 아닌 돼지 취급을 받게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선구적 이론가인 고드윈에게 자신의 아나키즘을 더 선구적으로 보여준 아나키스트는 스위프트였고, 특히 <걸리버 여행기>의 4부에 나오는 말의 나라가 고드윈이 꿈꾼 가장 이상적인 아나키 사회였다. 조지 오웰도 그렇게 보았다. 그러나 <동물농장>을 쓴 오웰은 말의 나라를 단순히 유토피아라고 보지는 않았다. 즉 그 유토피아에서 전체주의의 냄새를 맡았다. 그래서 17세기의 유토피아였던 <걸리버 여행기>는 20세기에 와서 디스토피아의 <동물농장>으로 변했다. <걸리버 여행기> 앞에 16세기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내세울 수도 있다. 법원과 법이 없는 사회를 유토피아로 그린 대법원장 모어는 나에게 아나키스트이지만 역시 그를 아나키스트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

나는 19세기의 <프랑켄슈타인>을 <동물농장>에서 그려진 디스토피아의 선구라고 본다. 루소의 고향이자 종교개혁의 출발지였고 민주주의의 온상이었던 제네바 출신의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은 프랑스대혁명을 비롯한 각종 혁명을 상징한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만들 때 “외모는 아름다운 것으로 골랐”고(63쪽)본래 괴물은 선량했지만 혁명은 급격히 추악하게 변해간다. 혁명 자체가 폭력화되었을 뿐 아니라 결국은 나폴레옹이라는 독재군인을 황제로 만드는 극단의 반동으로 치달았다. 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을 원래 해방자 나폴레옹으로 바치려고 작곡했다가 그의 황제 취임 소식을 듣고 포기했다는 이야기처럼 <프랑켄슈타인>도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으로 출발한 프랑스혁명이 폭력과 독재와 제국의 괴물로 변하는 과정을 괴물의 등장과 파멸로 상징한다고 나는 본다. 그림으로는 스페인의 고야가 그린 <거인>과 괴물들이 해당된다.  

그래도 <프랑켄슈타인>은 물론 <동물농장>까지도 처음에는 아름다운 유토피아로 출발했지만 21세기에 쓰인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은 처음부터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나타난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폭력혁명의 좀비들이야말로 프랑켄슈타인의 자식들이 아닌가? 그 좀비가 소설이나 영화에만 있는가? 바로 내 눈 앞에서 설치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바로 내 옆을 매일처럼 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좀비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프랑켄슈타인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묘한 웃음을 짓는 저 사람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살인마로 표변하지 않을까?     

 
메리 셸리의 삶

메리 셸리가 아나키즘의 아버지라는 윌리엄 고드윈과 페미니즘의 어머니라는 메리 울스턴크레프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것은 이 연재의 앞에서도 몇 번이나 말했다. 그녀가 태어난 1797년은 1789년의 프랑스혁명이 터지고 8년이 지난 뒤였다. 그녀의 부모는 프랑스혁명에 열광하여 아나키즘과 페미니즘을 시작했다. 그 혁명이 터진지 4년이 지난 1793년에 고드윈은 <정치적 정의>를 내면서 그 서문에서 자신의 사상을 실현할지 모르는 사건이라고 혁명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혁명 직후 그는 혁명의 결과가 폭력일 뿐이라고 개탄하고 점진적 사회개혁을 주장하면서 특히 학문 활동에 의한 진리의 전파와 대화 및 토론을 통한 대중 접근을 중시했다.  

출산 직후 죽은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 계모의 냉대 하에 대학을 졸업하기커녕 학교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19세의 여성이, 16세의 나이로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다른 나라로 도망쳐 첫 딸을 낳았다가 죽게 하고 고국에 돌아와서도 본처를 피해 숨어 살다가 첫 아들을 낳은 여성이, 자신의 여동생이 자살한 뒤 두 달이 지나 그 유부남의 아내가 자살한 20일 쯤 뒤에 그와 재혼한 19세의 여성이 쓴 괴기소설인 <프랑켄슈타인>이 그 작가의 삶을 반영하고, 나아가 그 삶 속에서 갖게 된 여성해방의 의지를 반영한다고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로 페미니즘 해석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여러 번역본 중에서 가장 최근인 2013년에 나온 한애경 번역의 책 해설에서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2018년의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도 그렇다. 영화의 원제는 ‘메리 셸리’인데 한국판에서는 굳이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이라는 부제를 덧붙였다. 상업주의의 발로인가, 아니면 메리 셸리의 생애가 바로 그 작품의 탄생이라는 식의 페미니즘 해석을 강조한 것인가? 이하 그 번역본에 따라 메리 셸리의 삶을 살펴보자.  

1818년 판 서문에서 메리 셸리의 남편인 퍼시 셸리는 그 소설이 “가족 간의 애정이 얼마나 사랑스러우며 보편적 미덕이 얼마나 탁월한 것인지를 보여”(12쪽) 주는 것이라고 하여 마치 퍼시와 메리 사이의 애절한 사랑에 기초한 가족애를 보여주는 것인 양 썼다. 만일 그렇다면 죽은 본처는 물론 그 자녀가 읽으면 기절할 내용일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소설의 내용은 그렇게 행복하기커녕 도리어 너무나 끔찍한 것이어서 그들이 기절하기커녕 도리어 고소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보편적 미덕’의 상징처럼 보이는 몇 명의 여성인 캐롤라인(프랑켄슈타인의 어머니)이나 엘리자베스(프랑켄슈타인의 연인이자 아내) 등도 모두 죽는다. 정의(저스티스)를 상징하는 듯한 하녀 저스틴도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죽는다. 이는 ‘보편적 미덕’을 갖춘 훌륭한 여성들이 현실에서는 지극히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물론 메리 셸리는 그런 현실을 수긍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들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와 아내를 잃은 프랑켄슈타인은 물론, 그가 만든 괴물도 여자 괴물의 파괴로 불행해지고 프랑켄슈타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불행해진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결혼하는 남녀는 프랑켄슈타인의 부모지만 그의 어머니인 캐롤라인도, 메리 셸리의 어머니인 울스턴크래프트처럼 일찍 죽는다.

한편 이 소설에 대한 주류 해석인 페미니즘적 해석은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 반항하고 분노하며 평등한 관계를 요구하는 점을 두고 그것이 남녀의 영역이나 순종적인 당대 여성상과 같은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한 점을 강조한다.(290쪽) 이는 괴물을 여성의 처지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한다. “친구도 동료도 없이 인간 사회에서 소외된 괴물의 처지,” “사회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소외된 존재,”(277쪽) “자연과 인간의 법 밖에 존재하는 사생아이자, 가정이라는 낙원에서 추방된 혐오스러운 변종, 그리고 당대 중산층의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소외된 존재의 총집합”(278쪽)이 여성의 처지와 같다는 것이다. 특히 메리 셸리가 자신의 죄의식과 복수의 환상에서 자신을 괴물로 그렸다는 식의 해석이다. 

나는 이런 해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하나의 작품이 다양하게 해석되는 것은 그 작품의 위대성을 증명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아나키즘과 페미니즘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였던 프랑스혁명이 민중의 급격한 요구에 의해 마침내 나폴레옹이라는 공멸의 괴물을 낳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1815년 나폴레옹은 몰락했고 메리 셸리는 1816년 <프랑켄슈타인>을 쓰기 시작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아나키즘

소설의 제1부 제1장 첫머리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제네바에서 태어났고, 우리 집안은 그 공화국의 최고 명문 가문”(37쪽) 출신이며 “부모님은 세상에서 누구 못지않게 다정했다”(39쪽)고 한다. “위대한 이웃 왕국보다 우리나라는 공화국 제도 덕분에 더 소박하고 좋은 풍습”이 생겨 “하층 계급도 가난하거나 무시 받지 않고”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심지어 하녀도 “무식하다는 관념도 없고, 인간의 존엄성을 희생할 필요도 없”다.(73쪽) 뒤에 아내가 되는 소꿉동무 엘리자베스는 “누구보다도 자유를 만끽했지만, 또한 누구보다 우아하게 구속과 변덕에 순종했다.”(40쪽) 그는 “누구보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41쪽) 루소를 낳은 제네바는 근대적 혁명의 진원지다. 루소의 영향으로 프랑스혁명이 터졌다. 그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부르주아만으로 끝나지 않고 민중으로 옮겨갔다. 말하자면 초기의 지롱드가 후기의 자코뱅으로 주도권이 옮겨간 것이다.  

소설 프랑켄슈타인 초판본
소설 프랑켄슈타인 초판본

그리고 제네바대학에 다니다가 열일곱 살 때 독일 남부의 잉골슈타트대학으로 옮겨 유골을 모아 괴물을 창조하는 연구에 몰두하고(47쪽) 2년 만에 그것을 완성한다. “하지만 작업이 끝나자, 아름다운 꿈은 사라지고 숨 막히는 공포와 혐오감만 마음에 가득했다.”(64쪽) 결국 제네바 외곽에서 프랑켄슈타인의 동생이 괴물에 의해 살해되고(80쪽) 하녀 저스틴이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처형된다. 프랑켄슈타인과 엘리자베스는 저스틴이 범인이 아님을 알고 그녀를 변호하지만 주변에서 그녀를 살인범으로 몰아간다. “호기심 때문에 법을 지키지 않은 괴물을 만든 결과”다.(92쪽)    

제2부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괴물을 저주한다. 그러자 괴물은 자신을 창조한 그가 자신을 미워하고 냉대한다고 비난한다. “내가 당신이 만든 피조물이란 사실을 기억해 줘. 난 아담이 되어야 하지만, 불행히도 타락한 천사가 되어 버렸어.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즐거운 세계에서 추방되었지. 주변을 둘러봐도 나 혼자만 행복에서 소외됐어. 난 원래 인정 많고 착한 존재였어. 하지만 불행하기 때문에 악마가 되었지. 날 행복한 존재로 만들어 줘. 그럼 다시 착한 존재가 될 거야.”(116-117쪽) “인간을 괴롭히고 곧 당신까지 죽일 악마가 될 지는 당신 손에 달려 있어.”(118쪽) 

제2부 제3장에서 제8장까지는 괴물이 하는 이야기다. 처음에 괴물은 착한 사람들을 만나 학문을 알고 싶어 하고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한다.(134쪽) 특히 역사와 지리를 배운다. “게으른 아시아인, 그리스인의 굉장한 천재성과 정신 활동, 초기 로마인의 전쟁과 놀라운 미덕 그리고 그 뒤의 타락, 강력한 제국의 몰락, 기사도와 기독교 그리고 왕들 이야기도 들었어.”(이 구절을 비롯하여 이 소설에 나오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의하지 않겠다.) “인간은 그렇게 강하고 덕이 높고 훌륭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사악하고 비열하단 말인가?” “심지어 법과 정부는 왜 존재하는 건지 오랫동안 이해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악과 학살 이야기를 자세히 들으니, 감탄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혐오감에 구역질이 나서 고개를 돌려 버렸어.” “인간들은 부와 결합된 고귀한 혈통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도 배웠어.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사람들은 존경할 거야. 하지만 둘 중 하나도 없으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선택된 소수를 위해 자기 힘을 낭비해야 하는 부랑자나 노예로 간주되었지.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나를 창조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지. 하지만 내게는 돈이나 친구, 재산이 전혀 없다는 정도는 알지. 게다가 내 외모는 끔찍하게 추악하고 혐오스럽지.”(139쪽)    

괴물은 눈먼 노인을 만나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프랑스사람이고 “불행하고 버림받은 존재”라고 말하고 노인에게 처음으로 환대를 받는다.(155쪽) 그러나 노인의 가족이 와서 괴물을 쫓아낸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일지를 보고 그가 제네바 사람임을 알고 그곳으로 간다. “인간의 탈을 쓴 다른 존재에게 얻어 보려 했지만 얻지 못한 정의를 당신에게 얻어 보기로 했어.”(162쪽) 제네바로 가는 길에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동생을 만나 그 순진함에 반하지만 그가 괴물을 저주하자 죽여 버린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에게 “나라는 존재에 필요한 연민을 나누며 살 수 있도록”(168쪽) 자신의 짝인 여자 괴물을 만들어달라고 정당하게 요구한다.(167쪽) 그리고 짝이 생기면 남미의 넓은 황무지로 가서 “평화롭고 인간적”으로 살겠다고 한다.(170쪽) 그리고 그 요구가 거부되면 또 다른 파괴적인 혁명이 발생한다고 경고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그것을 거부하다가 수용한다. 

제3부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여자 괴물을 만들다가 그것을 파괴해버린다. 이를 본 괴물은 “절망해 부르짖다가 복수를 다짐하며 사라진다.”(195쪽) 프랑켄슈타인의 약속 불이행은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의 죽음을 초래한다. 괴물은 평등을 원하지만 계속 거부당한다. 그리고는 제네바를 영원히 떠나 방랑을 하며 괴물을 쫓기 시작한다. 자신이 속할 수 있는 세계가 없다는 절망감에서 괴물은 결국 자살한다.  


메리 셸리의 평가와 영향 

<프랑켄슈타인>은 디스토피아 소설로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1984>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그 앞에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와 같은 작품들이 있다. 앞에서 나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프랑스혁명이라고 했지만, 그 소설의 부제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뜻하듯이 프랑켄슈타인이 신에게 생명을 훔쳐 죽은 인간을 살리는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줄기세포니 인간복제니 AI니 하는 첨단 과학기술의 무제한의 발전을 경계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은 이라크의 아흐메드 사다위가 2013년에 낸 소설로 2018년에 우리말로도 소개되었다.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자가 아니라 폐품업자라는 점을 비롯하여 원래의 프랑켄슈타인과 다른 점이 많다. 19세기 과학자는 육체와 영혼을 함께 만들어내지만 21세기 폐품업자는 갖가지 시체 조각만 연결할 뿐이고 영혼은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것으로 들어온다. 그 시체들이 분열된 여러 부족의 것들이어서 그것들을 조합한 자신이야말로 이라크 최초의 완벽한 통일체로서 제일 시민이라는 자부심까지 갖는 이라크 괴물은, 자기를 만든 창조자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19세기 괴물과 달리 인정투쟁 따위에는 관심이 없이 유일한 정의라고 하는 복수 일념일 뿐이다. 21세기의 가장 참혹한 전쟁 중 하나인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당연히 더 처참할 수밖에 없는 탓일까. 그러나 ‘무명’또는 ‘구세주’라고 불리는 바그다드의 괴물에게는 그 복수의 대상이 애매하다. 이라크 침략의 이유였던 살상무기가 사실은 영미의 지도자인 부시와 블레어가 꾸며낸 허구에 불과했으니 그들이야말로 참된 복수의 대상이어야 하거늘 바그다드 괴물은 국내의 개인에게만 복수를 감행할 뿐이다. 무자비한 살인이 계속되자 경찰은 못 생긴 사람을 무조건 잡아들이는 짓을 비롯하여 갖가지 블랙코미디가 벌어진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아랍의 메리 셸리’가 아니라 ‘아랍의 카프카’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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