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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 문학평론가 정명환 전 가톨릭대 교수
만나고 싶었습니다 : 문학평론가 정명환 전 가톨릭대 교수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10.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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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주의 비평 위험...자기 관점 뚜렷해야"

양재동 뱅뱅사거리에 위치한 정명환 전 성심여대 교수(75, 불문학)의 개인연구실을 두드렸다. 홀쭉한 몸채의 노인이 문을 열어 준다. 이분이 문학평론가 정명환 선생이구나. 몇 달 전 원고청탁 때문에 전화를 했다가 "글은 무슨 놈의 글"이냐고 날벼락을 맞은 적이 있는 지라, 괴팍한 분이 아닐까 걱정을 했는데 오히려 조용한 환대를 받았다.

"그 때는 심기가 불편했어요. 대통령이 바뀌면서 젊은 사람들이 나이먹은 사람들을 너무 내치는 것 같았단 말이죠. 교수신문도 젊은 사람들이 글을 많이 쓰잖아. 논조가 싫었다고."

 

사람을 이념으로 따져보는 건 요즘 정치사회 국면의 영향인 것 같다. 정 교수가 완고한 보수주의자가 아닐까라는 경박한 생각을 가졌었는데, 이번에 나온 그의 두권의 책을 읽으며 완전히 생각을 달리 가졌다. 지난 40년간 쓴 평문과 산문 가운데 주옥같은 글을 모은 비평집 '문학을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 刊)와 산문집 '이성의 언어를 위하여'(현대문학 刊)는 "똘망똘망한 지성"을 통해 문학을 사유하고자 한 주지주의 비평가의 자화상을 잘 보여준다. 10년 전에 나온 평론집 '문학을 찾아서'도 10년만의 책이었으니 寡作이라 할 만한 정 교수의 비평활동은 사실 이번 책으로 대미를 짓는 것이라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컴퓨터로 글도 쓰고, 서양에서의 문학적 근대라는 테마도 잡아서 옛날 책도 좀 뒤적이고. 요즘 소설은 거의 못 읽는데, 젊은 작가 가운데 오정희라는 사람을 한번 읽어볼까 생각 중이긴 하지."

뭔가 이상하다. 오정희는 이제 원로를 앞둔 중견인데 젊은 작가라니. 1990년대 이후 한국소설의 지형에 대한 충고를 염두에 두고 찾아갔던 입장에서는 난감함이 눈앞을 가리는 말이다. 대화의 핀트는 계속 엇나간다. "선생님, 요즘 소설은 실존성이 부족하구요, 그리고 욕망의 거품이 너무 만개하구요"라고 자극을 시도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래요? 요즘에 그런 소설이 없어요? 욕망하는 자아와 윤리적인 자아의 갈등 같은 것을 주요하게 다루는 이를테면 이청준 같은 이가 없단 말인가요?"라는 식이다.

이렇게 되니 괜히 머쓱해진다. 앞장서서 젊은 작가들 욕보였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주제를 건너뛰어 바로 사르트르로 들어갔다. 정 교수는 이 땅에 사르트르의 문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사람이다. 1950년대 조연현 등 국내 학자들의 실존주의 오용을 비판한 유명한 평론 '평론가는 이방인인가'가 이번 평론집의 첫 글로 수록돼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사르트르는 내 사유의 출발점이긴 하지만, 향일점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나는 그의 부정적 계몽작업에 동의해요. 문학의 계몽은 무지몽매를 일깨우는 게 아니거든. 그건 아는 체 하는 사람, 전일체처럼 행동하는 자아에서 균열을 지적하고, 그 부족함을 일깨우는 이의제기의 과정이거든요. 그래서 힘이 들어요. 그냥 집짓기는 쉽지만, 있던 집을 허물고 다시 짓는 게 훨씬 힘들잖아요."

정 교수는 동질성과 통일성을 중시한 참여, 순수문학 양 진영에 모두 거리를 두고 활동을 해왔다. 스스로 "이기적"이라 생각할 정도로 글도 고집스럽게 썼다. 한편으로는 문학과 정치, 문학과 철학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문학의 거울이미지를 구했다. 이처럼 안으로 파고드는 정 교수의 평론에 대해 세간에서 내린 평가는 "그는 명쾌한 평론가야" 라는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한편의 아름다운 그림 같은 평론도 있는데 가령 이번 책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雪國'을 분석한 글이 그렇다.

"가장 위험한 것은 환원주의예요. 한국문학은 한의 문학이다. 이게 가장 나빠. 나는 작품을 이런 관점에서 이렇게 바라보고 그게 진정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보여주는 게 정석이 아닐까."

정 교수의 평론이 요즘의 평론과 다른 것은, 평론 속에 작품을 위해 마련된 자리가 넓다는 점이다. 평론과 작품이 잘 섞였다는 게 아니라, 작품이 평론 속에서 편하게 숨쉬고 있다는 느낌이다. 겸손함, 일관성, 평범한 어투 속에서 논리의 맥을 이어가기 때문에 비평가의 내면도 또렷하게 살아난다. 아무래도 이것은 문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그의 성찰에서 생겨난 노하우의 힘일 것 같다.

"데리다가 논리를 해체해도 글을 쓸 때는 논리적이잖아요. 반면에 문학은 모순된 것을 그대로 나타내요. 그리고 과정을 모두 보여줍니다. 프루스트의 소설을 보면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그러면서 기억의 영원성을 얻어내잖아요. 그래서 철학과 달라요. 평론도 문학이죠. 그래서 그건 과정적이고 모순적일 때도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런 모순적인 상황을 조직하는 언어는 이성적이라야 해요. 복잡하죠?"

발레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건축가처럼 시를 쓴다. 듣는 사람은 문학으로 들어라"고 말이다.

책의 말미에는 약간 의외의 느낌을 주는 글이 실렸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의 사상'에 대한 서평 성격의 글이다. 정 교수가 1976년 일본에서 1년 머물 때, 일본 사상계의 천황으로 떠받들여지는 마루야마는 당시 '공공의 적'으로 축출된 상태였다. 메이지 1백년을 맞아 기술적 근대에서 서양을 앞지른 일본이 정신적인 영역까지 서구를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 그들의 신화와 역사의 장엄성에 눈길을 돌렸을 때, 서구의 사상을 수용해온 일본 지식계를 샅샅이 지적하고 나서는 마루야마 같은 이는 일본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원흉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었다.

"나하고 친한 사람들도 금방 등을 돌리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오늘날 우리야말로 마루야마 식으로 우리의 근대를 뿌리부터 다시 파헤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맑시스트는 아니지만 프레드릭 제임슨을 참 좋아합니다. 대중문화를 보는 그의 시각이 좋아요. 좌파적 시각 좋아요. 하지만 제임슨처럼 설득력 있게 의견을 개진하라 이겁니다."

이렇게 정 교수는 요즘 젊은 사람들,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세상에 대한 그의 관점은 산문집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가령 '국정 중학교 교과서'의 도덕교육을 문제삼은 '이성의 언어를 위하여'를 보면 "왜 박정희, 전두환 체제에 저항한 사람은 진보세력밖에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입장과, 청계천을 감상한 '변덕'을 보면 "나는 나를 조롱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정 교수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현장문학을 떠난 지도 벌써 10년을 헤아리지만, 문학을 바라보고 정리하는 면, 잘 된 평론과 글쓰기의 윤리 등에 대해서 그의 책과 말은 많은 암시를 던져주고 있었다. 이렇게 연륜이 쌓여 올라간 눈으로 볼 땐 오정희 같은 작가조차 '신인'으로 보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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