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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리뷰 : 『해협』(이진희 지음, 이규수 옮김, 삼인 刊)
주간리뷰 : 『해협』(이진희 지음, 이규수 옮김, 삼인 刊)
  • 임경석 성균관대
  • 승인 2003.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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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사회 담은 만화경

임경석 /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근대사

자화상은 화가들만의 것이 아니다. 때로는 화가 아닌 사람도 자화상을 남긴다. 이 책은 재일본 한국인 역사가 이진희 교수가 고희를 넘기면서 그린 자화상이다. 위대한 화가의 자화상에는 삶의 역정이 잘 형상화돼 있는 법이다. 그렇듯이 이 책에도 한 원로 역사가의 곡절에 찬 인생 행로와 고뇌, 그의 가치관과 문제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첫 연구 작업은 전투를 앞두고 참호에 엎드린 병사의 그것처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이뤄졌다. 그가 한국 고고학 연구에 첫발을 내디딘 때는 1950년대였다. 한사군의 북부지방 지배와 임나일본부의 남부지방 지배가 한국 토착 사회의 발전을 초래했다는 견해가 학계의 주류를 점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이러한 견해는 역경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온 한국인들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는 일본인 식민주의자들이 남긴 타율성 사관을 극복하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자신의 학문 활동을 시작했다. 황국사관에 도전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뒷날 그에게 명성을 안겨다 준 '광개토왕릉비 연구'를 비롯한 고대사 논문들은 이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

이 책에는 냉전기를 일본에서 보낸 한국인 학자의 사상적, 심리적 역정이 묘사돼 있다. 그는 청년기이래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가 사람들의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시키는 체제며, 머지 않아 유토피아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분단된 두 조국 중에 북한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머지 않아 북송 교포들의 생활 실태를 목도해야만 했다. 또한 조선인총연합회 상층 간부들의 사상통제를 겪어야 했다. 그는 42세 되던 1971년에 조총련이 운영하는 민족학교인 조선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뒀다. 조총련과 북한 체제는 그가 염원해 오던 사회주의와는 무관하다는 판단이었다. 급기야 그는 1981년에는 남한을 방문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이 책은 이러한 사상적, 심리적 격변이 한 사람의 심중에서 어떻게 회오리쳤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은 재일 한국인 지식인 사회의 다채로운 모습을 담은 만화경이다. 지은이를 포함해 강재언, 박경식, 강덕상 등과 같은 쟁쟁한 재일 역사학자들, 김달수 등 문인들의 사적인 면모가 그려져 있다. 또한 계간 '삼천리'와 계간 '청구'의 편집장을 지내면서 그가 교유한 숱한 인사들의 풍모도 수록돼 있다. 일본인 학자, 문화계 인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근현대 사학사와 지성사를 재구성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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