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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42) - 자연주의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42) - 자연주의
  • 교수신문
  • 승인 2020.01.1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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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를 향한 철학자들의 다양한 식견들… 라쇼몽 현상 아닐까

머리가 안 돌아가 엊저녁에 일찍 누웠더니 새벽에 눈이 떠졌다. 책자를 얻어놓고 본다면서 침대 옆에 놓아만 두었던 대회보를 드디어 펼쳐 들었다. 제목이 ‘자연주의 대 반자연주의’(한국철학회, 2019)니 흥미가 있었다. 대회의 주제가 벌써 논쟁을 보여주는 것이니 재미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도 자연주의에 대한 상이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니 관심이 갔던 것이다. 

여기서 철학적 내용을 다 소개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내가 봐도 난삽한 용어가 난무해서 아무리 지성인이라고 해도 해독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이른바 영국과 미국에서 유행하던 ‘분석철학’의 끝자락도 공유하고 있는 논쟁이라서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은 집어치워라, 인식론은 생물학으로 보내라, 진리가 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주장에 이어 나오는 막바지 또는 새로운 문제다.  

2019년 11월 브라운대 철학과의 김재권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국 내에서도 심리철학으로 영향력을 발휘했으니 한국인들도 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의 주장은 이른바 ‘물리주의’로 ‘수반이론’으로 통한다. 쉽게 말해 물리주의란 정신이 아닌 물질이 우선한다는 현대판 유물론이며, 수반(隨伴)이란 ‘따른다’는 뜻으로 정신이 물질에 따른다는 주장이다. 정신이 물질의 최소단위로 환원된다는 점에서 크게 ‘환원주의’에 속한다. 한마디로 오늘날 유행하는 과학의 이념을 철학적으로 정초시키는 데 앞장선 것이다. 

분석철학의 막바지라고 한 것은 1969년 콰인이 ‘인식론 자연화하기’에서 전통적인 인식론보다는 심리학과 같은 경험과학이 그것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재권은 이를 반대하여 인식론에서 지식이 정당화될 수 없다면 지식 그 자체도 인식(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자칫하면 모든 것이 근거 없다는 포스트모던의 ‘나 몰라’라는 입장으로 나가기 쉽다. 

그럼에도 김재권도 자연주의에 속한다. 왜냐하면 환원주의와 물리주의는 모두 물질적 속성을 앞세우지 그것을 넘어서는 관념, 정신, 형이상학 같은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연주의(naturalism)이라는 현대서구학계의 정의를 엿볼 수 있다. 김재권이 콰인의 환원주의를 반대했다고 해서 그가 강한 환원주의에 회의를 보인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환원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반자연주의는 아니라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우리의 삶이 모두 자연의 성질에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면 자연주의고,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반자연주의가 되는 셈이다. 

전남대 노양진 교수에 따르면 이렇다. 자연주의는 강한 환원주의적 물리주의를 표방하지만, 그런 ‘환원적 자연주의’ 말고 ‘창발적(emergentist) 자연주의’도 있어 그것이 ‘체험주의’(experimentalism)로 이해될 수 있다면, 과도한 사변을 버리고도 경험적 해명을 통해 열린 철학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창발이란 말로 멋지게 번역은 되지만 원의에서 알 수 있듯이 ‘뜻밖의 것’은 늘 있다는 이야기다. 물리세계와 정신세계의 곤혹스런 관계를 듀이 이래 ‘의외의 출현’(emergence)으로 설명해왔고, 오늘날은 그렇게 설명할 충분한 과학적 기반이 마련돼 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창발성을 떠올리면 받아들이기 쉽다.

여기에 동양의 자연 개념을 넣으면 세상 더 복잡해진다. 순자 자체를 자연주의로도, 순자 속의 성악설은 자연주의이고 ‘그것을 변화시켜 인위를 만들자’(化性起僞)는 것은 반자연주의로도 본다. 그럼 노자는, 장자는, 맹자는? 헷갈리기 시작한다. 

물리세계를 가리키는 자연 또는 자연주의라는 말 하나 갖고도 이렇게 사람마다 다른데, 정신 또는 의미세계를 말하는 옳음 또는 정의(正義)야 더 시끄러워야 하는 것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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