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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를 위한 변론...사실인식부터 오류
친일파를 위한 변론...사실인식부터 오류
  • 박찬승 충남대
  • 승인 2003.09.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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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 :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복거일 지음, 들린아침 刊)

이 책의 제목은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라고 되어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친일파의 복권을 주창하는 '친일파를 위한 변호'라고 할 수 있다. 다분히 도발적인 주장이다. 저자는 소설가이면서, 대중들의 취향에 맞게 글을 쓰는 사람이다. 따라서 대중들이 이 책을 읽으면 그의 논리에 빠져들기 쉽게 되어 있다. 또 저자는 학계의 연구결과를 상당 부분 인용해가면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사실인식과 역사인식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혹세무민'의 책일 뿐이다.

첫째, 저자의 식민통치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다. 저자는 이 책의 식민통치 평가 부분에서 식민지시대 조선의 인구는 비슷한 시기의 아시아나 세계의 인구보다 훨씬 인구증가율이 높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식민통치의 본질적 제약과 폐해들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서 조선사람들은 상당히 잘 살았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1910년 조선의 인구는 1312만여 명이었는데, 1942년 2552만여 명으로 늘어나 연평균 증가율이 2.09%에 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통계는 문제가 있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의하면 조선의 인구는 1910년 1312만 여명에서, 1916년 1630만여 명으로 6년 동안 무려 320만명 가량이 증가했다. 그런데 1919년에는 1678만여 명으로 3년 동안 겨우 48만 명 증가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말까지 조선 정부는 호적을 만들 때 모든 인구를 파악하지 않았다. 호적에 올라간 인구는 전체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은 세금을 부담할 수 있는 사람만 호적에 올렸기 때문이다. 일제는 통감부 시절 이후 호적을 새로 만들면서 누락된 인구를 계속 파악했는데, 그런 작업은 1910년 중반에야 어느 정도 완료된 것이다.

따라서 1910년경의 실제 인구는 이미 1600만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942년까지 약 9백만 정도가 증가한 것으로, 인구 증가율은 크게 낮아진다. 1935년에 나온 <숫자조선연구>에 의하면, 1910년 이후 조선인구의 자연증가율은 1천명에 11명 정도로, 세계 각국의 경우와 비교할 때 평균 수준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인구가 늘어나는 가운데 생활이 극히 궁박한 세민(細民),  긴급 구제를 요하는 궁민(窮民), 그리고 걸인(乞人)의 수가 전체 인구의 1926년 11.2%, 1926년 21.4%, 1931년 26.8%로 계속 늘어갔다는 점이다(이는 일본인들이 만든 통계이다. <숫자조선연구> 참고).

이처럼 세궁민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식민지 시대를 과연 '잘 살았던 시대'라고 할 수 있을까. 또 백보 양보하여 설사 '물질적으로 잘 살았던 시대'라 하더라도 나라없는 백성들이 물질적으로 전보다 좀더 풍요해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노예의 배부름'에 불과한 것이다. 주인은 노예를 부리기 위해서 어느 정도 노예를 배불리 먹일 필요가 있다. 노예가 조금 배부르게 되었다 해서 그 노예가 '잘 살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둘째, 저자는 최근의 친일청산 문제에 대한 담론을 왜곡하고 있다. 최근의 친일파청산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역사적 청산이라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마치 오늘날 친일문제를 거론하는 이들이 친일파들을 가려내어 '기소하고 재판하고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실제로 친일행위를 한 이들은 이미 거의 다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누굴 법적으로 처벌한다는 말인가. 저자는 또 반세기 동안 친일파라는 비난에 시달렸으면 이제는 그들을 평안하게 쉴 수 있도록 해주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친일파라는 비난에 시달린 이들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그들은 해방 이후 이 사회에서 힘 있는 자, 부를 가진 자로서 군림해오지 않았는가. 저자는 이제는 친일문제 연구보다는, 그동안 소홀히 해 온 민족운동을 연구하자는 주장도 한다. 1980년대 이후 민족운동 연구는 상당히 진척되었다. 하지만 친일문제에 관한 연구는 박사논문 한 편도 나오지 않았다. 친일문제를 글로 쓴 서울대 미대의 한 교수가 대학사회에서 추방된 뒤 아직도 복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셋째, 저자는 친일파 혹은 친일행위를 규정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친일행위로 규정되는 행위들은 불법적이며, 자발적이고, 조선인들에게 해로운 행위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1910년 8월 이후 그런 행위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고문을 한 경우와, 여자들을 속이거나 납치해서 종군위안부로 보낸 경우 정도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머지 총독부의 고위 관리를 지낸 경우나, 지주나 자본가로서 일제에 협력한 경우는 합법적이고, 강제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친일 행위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서 합법이란 총독부가 정해놓은 법의 테두리라는 뜻이다. 친일행위를 당시의 상황에서 합법, 불법으로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당시의 상황에서 불법적 독립운동은 있었지만, 불법적 친일행위라는 것이 있었을까. '자발'과 '강제'를 구분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일제 말기 친일단체에 열성적인 인물들 가운데에는 일신의 영달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인물들이 얼마든지 있다.

'친일파'의 범주를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친일행위'를 그 정도에 따라 정리해두는 작업은 충분히 가능하다. 오늘날 친일문제의 청산을 주장하는 이들은 바로 그러한 작업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사회든지 그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동체적 윤리가 필요하다. 친일이라는 부역행위는 바로 그러한 윤리를 배반한 경우이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정의가 살아 있는 사회, 원칙이 서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일신의 부귀와 영달을 위해 정의와 원칙을 배반한 과거의 행위들에 대한 정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넷째, 저자는 자치운동과 참정권청원운동을 독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운동'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을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여기고 있던 일본정부는 조선에 자치권을 절대 줄 수 없었고, 일본 의회에 참여하게 하는 참정권부여도 역시 캐스팅보트의 우려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일부 민족주의자들과 친일분자들이 이같은 운동을 하고 다녔던 것은 현실 파악이 잘못 되었거나, 일제의 사주를 받아 독립운동 전선을 교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저자가 재평가해야 한다고 한 민원식은 3.1운동을 '망동'이라고 규정한 글을 매일신보에 싣고, 친일단체 국민협회를 만들어 일본정부에 참정권청원운동을 한 자로서, 당시 임시정부는 그를 '매국노'로서 '칠가살'(七可殺)의 대표적 인물로 규정할 정도였다. 그런 인물을 재평가하자니 실로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무릇 글쓰는 자는 삼가고 또 삼가야 한다. 저자의 말대로 진실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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