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3:30 (금)
논쟁서평 : 『상품의 역사: 르네상스의 새로운 역사』(리사 자딘 지음, 이선근 옮김, 영림카디널 刊)
논쟁서평 : 『상품의 역사: 르네상스의 새로운 역사』(리사 자딘 지음, 이선근 옮김, 영림카디널 刊)
  • 이재희 경성대
  • 승인 2003.09.2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탈유럽·탈인문의 르네상스 그려…역사서로는 정태적

이재희 /경성대·경제학

오랫동안 역사가들은 예술발전이 경제적 번영기에 이룩된다는 가설에 동의해왔다. 얼핏 이 가설은 자명해 보인다. 예술수요는 사람들의 부와 소득에 좌우되고, 그것은 경제성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 가설에 의문이 제기됐다.

르네상스 예술이 최성기에 달한 14, 15세기가 경제적 침체기였고, 오히려 경제가 가장 번성했던 13세기에는 이렇다할 예술적 성취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경제적 번영기보다는 침체기에 예술이 발전한다는 가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번영기에는 수익성 높은 산업들이 성장하지만, 침체기에 예술처럼 비생산적 산업에 투자가 촉진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예술과 경제의 관계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은 듯하다.

미술품의 유통과 향유에 대한 실질적 정보 돋보여

'상품의 역사'는 르네상스 후기인 15, 16세기의 문화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저자는 쟁점이 되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를 새롭게 이해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이 시대의 예술을 규정한 것은 종교적, 정신적 면이 아니라 물질적, 상업적 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상업과 무역의 발달로 말미암아 거대한 부를 가진 사람들이 늘었으며, 경제적 성공과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진귀하고 사치스런 물품을 소유하려는 욕구가 이들 사이에  넘쳤다. 이러한 세속적 욕구가 바로 예술생산을 유발하고 촉진했다. 르네상스의 예술적 걸작들은 그 소유자들의 영광을 칭송하기 위해 제작된 완전히 상업적인 작품들이었다.

이 책은 르네상스의 새로운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르네상스를 휴머니즘의 승리라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르네상스 예술이 휴머니즘 정신이 아니라 부의 과시적 소비라는 물질적 동기에 의해 추동됐다는 관점 그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르네상스 예술이 세속적 욕구에 지배됐다는 관점은 오래된 것이며, 특히 르네상스가 당대의 경제적 번영 결과라는 생각은 단순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논쟁 구도에서 벗어난 면이 있다.

이 책의 새로운 면은 그런 전체적인 관점이 아니라, 구체적인 서술 내용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말로써 주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보여주고 자세히 설명하는 데에 저자의 노력이 느껴진다.

이 책에는 그림, 서적, 보석, 장신구, 골동품 등 르네상스 시대를 대변하는 각종 물품에 관한 풍부한 정보와 그에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넘치고 있다. 가령 필자는 귀족, 부호만이 아니라 에라스무스 같은 학자들 사이에까지 널리 유행했던 초상메달의 실제적인 용도가 늘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 그런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예술품의 해석 방식에서도 경청할만한 부분이 적지 않으며, 그 가운데 홀바인의 '대사들'에 관한 해석은 압권이라 할 만하다. 33장의 칼라 그림과 161장에 달하는 흑백 그림이 들어 있어, 저자가 말하고 있는 대상을 바로 확인해 볼 수 있게 한 것도 책의 이해를 쉽게 해준다.

이 책의 다른 중요한 특징은 오스만제국을 르네상스 속에 포함시켜 다룬 점이다. 그 동안 르네상스는 남부 르네상스와 북부 르네상스로 분화돼 다뤄졌으나 그 범위는 늘 유럽이라는 경계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기독교 세계를 넘어 이슬람 세계까지 포괄해 르네상스 문화를 파악한 것은 참신해 보인다.

르네상스와 오늘날의 다문화주의와의 연결은 무리

다만 여기서 더 나아가 르네상스를 세계적 다문화주의로서 오늘날과 유사성을 지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르네상스의 소비주의와 오늘날의 그것을 직접 연관짓는 것도 마찬가지다. 외견상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4∼5백년간에 걸쳐 진행된 여러 단계의 역사발전을 간과하는 것은 초역사적 태도로 비칠 수 있다. 사실 이 책은 역사서로서는 정태적인 느낌을 준다.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르네상스와 그 이후의 차별성에 의거한 르네상스의 역사적 위치나 특징이 부각되지 않는다. 경제학자의 시각에서, 르네상스 시각의 상업주의 혹은 자본주의 발전에 관한 생각도 찾아보기 어렵다.

어쨌든 저자는 르네상스에 대한 완전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제적 동기가 르네상스 예술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 책만큼  실제적이며 자세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발견하기 어렵다. 본격적인 학술서가 아니지만(수많은 인용이 있음에도 자료의 출처가 제시되지 않고 각주가 없다), 이 책은 구미 대학들에서 관련 교과목의 참고자료로 활용되는 것은 그런 강점 때문이다.

번역서 제목인 '상품의 역사'는 너무 일반적이라 그 뜻이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또 역사를 번역할 때 늘 문제가 되는 고유명사에 대해서 번역자가 주의를 많이 기울인 것 같지만, 아직도 파두아(파도바), 브뤼지(브뤼헤) 등 지명과 티티안(티치아노) 등 인명이 눈에 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쉽게 읽혀지고, 주요 용어에 대해서 일일이 주석을 단 것은 친절하고 유익하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한국의 독점자본 형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제성장과 발전, 개발경제가 주요 연구영역이다. 저서로 '1970년대 후반기의 정치사회변동', '한국재벌개혁론' 등이 있으며 미술품에 대한 조예도 깊어 '예술과 경제'란 책도 펴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