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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문화비평
  • 김선욱 숭실대
  • 승인 2003.09.26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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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문화'다!

숭실대 / 철학

미국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학교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금융학을 전공하던 지인이 합석했다. 귀국을 얼마 앞둔 그는, 내게 귀국하면 어떤 일을 할 건지 물어 왔다. 내 전공이 철학임을 알고 있던 그인지라 질문은 직장에 대해서가 아닌 내 활동의 궁극적 관심사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동안 생각해서 내뱉은 대답은 ‘문화비평’이었다. 순간, 소위 주류 경제학의 전통 속에서 공부하던 그의 얼굴엔 비웃음이라고 느껴질 미소가 흘렀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 데이터가 있어야 하고, 가시적인 결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그네들에겐 문화란 대체로 적극적인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으리라. “뭘 그런 걸 학문이라고 하나...”라고 생각할만한 대화가 이어졌다.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그 일을 회상케 한 사건은 이 칼럼의 원고청탁이었다. 칼럼 제목이 ‘문화비평’이라니, 어찌 기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귀국 후 그 지인을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그의 한국 생활에 대해 들을 기회는 있었다. 미국에서 낳아 키워 온 두 아이를 초등학교에 넣고 그 가족이 당한 고통은 바로 문화에서 온 것이었다. 우리말을 잘 하지 못하는 아이들 때문에 학교에 나가 온갖 노력봉사를 했지만, 담임선생님이 원한 것은 그것과는 다른 것임을 곧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보다 늦게 귀국한 우리 부부도 아이들의 언어 문제로 같은 염려를 했지만, 우리 아이들이 들어간 초등학교에선 다양성을 장려하는 문화 교육을 실시한다고 했고, 학생들의 학과 공부의 부담을 줄여 준다고 자랑하니, 우리의 형편은 많이 나은 줄로 생각했었다. 그 다양성 교육이 획일적으로 실시되고 있음을, 그리고 못 다한 학과공부는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될 때까지는.

문제는 문화에 있다. 어찌 초등학교뿐이랴. 대학문화도 그렇고 정치문화도 그렇잖은가. 문화란 마치 물고기가 살고 있는 물과 같아서 물이 서서히 오염되어 가더라도 물고기는 그 변화를 미처 감지하지 못하다가, 결국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러서야 발버둥친다. 그러고 보면 우리 문화도 질식사할 정도에까지 이르지 않았나 싶다. 자살하는 사람이 하루 평균 열 명이 넘는다고 했던가. 이민 마켓은 북새통이라고 하고, 가능한 한 조기에 자녀를 유학 보내는 게 자식사랑이 돼버렸으니 말이다.

아이의 초등학교 친구 어머니들로부터 아내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왜 들어오셨나요? 남들은 다 나가려고 안달인데”였다. “당연히 들어와야죠.”란 대답은 더 이상 정당한 대답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물어오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미 이 땅을 떠난 것을 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문화를 상대주의적 넉넉함으로만 대할 것은 아닌 듯 같다. 문화도 사람이 살만한 문화가 있고, 또 사람이 살지 못하게 만드는 문화도 있기 때문이다. 문화에도 사람을 죽이는 오염 물질이 있나보다. 절대주의적 시각으로 문화를 평가할 때 발생하는 죄악은 이미 역사를 통해 입증된 것이지만, 상대주의적 포용력도 능사는 아닌 것이다.

우리 문화 오염의 근원을 추적하다 보면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만나게 된다. 물질적으로 잘 살게 된 게 결코 나쁜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돈 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철학강의를 하면서도, 물질적 욕망을 넘어설 때 문화가 가능하다는 것보다는, 문화를 잘 알아야 돈을 많이 번다고 말하도록 충동을 받고 있지 않은가. 철학을 잘하면 탈레스처럼, 또 조지 소로스처럼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문득, 변질되어 가는 문화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귀한 게 무얼까 생각해봤다. 몇 년 전 영화 ‘친구’가 히트할 수 있었던 건, ‘친구 아이가’라는 말이 우리 가슴에서 파낸 情 때문이었다고 나름대로 생각해봤다. 가슴에 비수 꽂힌 친구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 버린 정에 대한 아련한 향수 말이다. 한때는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이며, 영어로 옮길 수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무어라 칭송됐던 정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돼버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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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2003-10-01 14:36:07
이민이 열풍이다. 거기다가 전부터 있던 조기 유학까지... 물론 한국에서 학연, 지연과 같은 이유로 능력과 무관하게 터무니없이 차별받는 이들에게 이민은 마지막 카드이다. 그렇지만 정말 신중해야한다. 외국, 특히 미국에 나가면 물질차원에 있어서, 그리고 그냥 먹고 사는 기준에 있어서, 너무나 풍요롭다. 그 풍요로움이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때로는 느끼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그 물질적 생활이라는 그릇을 채우는 안 보이는 공기,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요소가 있다. 그게 언어 장벽, 인종차별 등등으로 나타난다. 돈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물질주의 사회인 한국사회에서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문화마저 돈으로 사려고 하니, 그게 바로 후진국적 기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