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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열전11 - 고드윈
박홍규의 아나키스트열전11 - 고드윈
  • 교수신문
  • 승인 2019.12.2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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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왕성한 정신력으로 모든 권위와 맞선 그 이름
(왼쪽부터) 윌리엄 고드윈, 메리 셀리,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
(왼쪽부터) 윌리엄 고드윈, 메리 셀리,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

영화 속의 고드윈 
영화에 아나키스트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해할만한 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홍콩 느와르 영화의 주인들처럼 묘사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유감이 있다. 가령 <아나키스트>라는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아나키스트들은 의열단 사람들로 설정되었음에도 그런 느낌을 버릴 수 없다.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지가 불명하여 다행이라고 할까. 시대의 분위기에 대한 묘사는 물론이고 의열단원의 생활이나 생각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조차 없이 ‘멋쟁이 테러리스트’ 정도로 아나키스트를 그린 것이 아닐까. 의열단원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삶은 낭만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영화 <박열>은 그 정도로 심한 느와르는 아니었지만 아나키스트보다는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묘사된 점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사실 박열은 1935년에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고 1946년 출옥 후에는 일본인으로 산다고 하면서 민족주의적인 조총련에 반대하는 민단 조직에 앞장섰다. 그래서 그가 아나키스트로서는 물론이고 독립운동가로서도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일까 그 영화는 물론 최근 문경에 지어진 그의 기념관을 방문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은 불편했다. 그곳 문경에서 초등학교 시절에 본 영화 <상록수>가 나의 아나키즘 감각에 더 맞는 탓일까. 
서양 영화에는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그리 많지 않고, 그런 경우라고 해도 영화 <윈스턴리>처럼 주인공보다는 함께 공동체를 만든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곤 한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에 나오는 만년의 톨스토이와 그의 제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이지만 영화에서는 아나키스트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그들의 삶도 평범한 시민의 공동체적 생활일 뿐 느와르 냄새는 전혀 없다. 워런 비티가 만든 <레즈>에는 저명한 아나키스트가 다수 나오지만, 그 중 우리에게도 유명한 엠마 골드만이 영화에 잠깐 나와 몇 마디 던지고는 사라지는 것처럼 아나키스트들은 평범하다. <랜드 앤 프리덤>을 비롯하여 스페인 시민전쟁을 다룬 영화에 등장하는 아나키스트들도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나오는 아나키스트들도 마찬가지다. 위인이 아니라 평범한 농부나 시민인 아나키스트가 참된 아나키스트이고 그래서 그들은 맑고 아름답다. 
근대 최초의 아나키스트 또는 아나키즘의 최초 이론가라고 볼 수 있는 윌리엄 고드윈은 그의 딸을 주인공으로 한 최근 영화 <메리 셸리-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의 몇 부분에서 초라한 서점 주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고드윈과 그의 첫 부인인 울스턴크래프트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가 시인 셸리를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로 영화는 시작되니 아마도 메리가 17세인 1814년 이전일 것이다. 1814년이면 고드윈은 58세였다. 1793년에 대표작인 이론서 <정치적 정의>를 발표했을 때에는 악명이라도 있었지만 그 뒤로는 하루살이처럼 살았다. 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메리는 어머니처럼 유부남 시인 셸리와 사랑하고 그 아내가 자살한 뒤에 결혼했지만 몇 년 뒤 셰리는 죽고 평생을 홀로 살았다.   
지금은, 아니 1970년대 이후에 와서야 울스턴크래프트나 메리 셸리는 소위 세상의 인정이라는 것을 받았다. 고드윈도 20세기 후반에야 아나키즘 이론의 시조 중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도 영국을 제외하면 그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못하다. 지금은 고드윈, 울스턴크래프트, 메리 셸리는 각각 아나키즘과 페미니즘의 원조, 그리고 그 둘의 결합이 나은 위대한 작가로 인정을 받고, 그들보다 앞서서 유명했던 셸리 역시 다시금 아나키스트시인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고달팠다.        

근대 아나키즘의 탄생
근대 아나키즘은 페미니즘과 함께 18세기말, 나중에 부부된 한 쌍의 남녀에 의해 함께 탄생했다. 곧 아나키즘은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 1756-1836)이 <정치적 정의와 그것이 일반 미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고찰>(Enquiry concerning Political Justice and Its Influence on General Virtue and Happiness)를 쓴 1793년에 시작되었고, 페미니즘은 1797년에 그가 결혼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olstonecraft, 1759-1797)가 <여성 인권의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1792)를 쓴 뒤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에드먼드 버크(Edmond Burke, 1729~1797) 류의 보수적인 프랑스혁명 비판에 대한 비판이었던 점에서 토머스 페인(Tomas Paine, 1739~1809)의 경우와 유사했다. 이렇게 아나키즘과 페미니즘 그리고 인권사상은 한 쌍의 부부에 의해 함께 탄생했다. 
‘최초의 아나키스트’ 또는 ‘철학적 아나키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드윈은 비국교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목사가 되었으나, 28세에 자기 이름으로 처음 출판한 <역사의 스케치>(Sketches of History, 1784)에서 “신은 폭군이 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고 3년 뒤 32세가 된 1787년에는 신을 부정하고 다시 2년 뒤인 1789년에 터진 프랑스혁명에 열광했다. 1793년에 <정치적 정의>가 출판되자 당시의 윌리엄 피트 수상은 그 책을 유명한 영국인이 구입하기에는 1파운드 이상이라는 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검열할 필요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이 책은 4000부 이상이 팔려 저자에게 문학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마찬가지로 인기를 끈 소설을 다음 해 출판해 고드윈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진보인사로 통했다.
한편 고드윈보다 3세 어린 울스턴크래프트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가정교사 등으로 어렵게 살다가 프랑스에 건너가 혁명을 직접 목격했고 미국인 모험가와 동거하면서 딸을 낳았다. 런던으로 돌아온 그녀는 고드윈과도 결혼 전에 임신을 했으나, 적법한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 1797년에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전에 결혼한 적이 없었으면서 출산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들은 많은 친구를 잃었다. 게다가 고드윈은 <정치적 정의>에서 결혼의 폐지를 옹호했기 때문에 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결혼 후 그들은 다른 집에서 살면서 하인들이 전달한 메모로 의사소통을 했다. 그러나 둘째딸 메리를 낳고 11일 뒤에 38세로 사망했다. 
1년 뒤 1798년에 고드윈은 『여성의 권리 옹호의 저자에 관한 회고록』을 썼다. 아내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담은 책이지만, 당시로서는 금기의 대상이었던 사생아, 자유연애, 자살기도 같은 것도 그대로 실려 낭만주의 시인 로버트 사우디에 의해 “죽은 처의 시체를 발가벗겼다”고 매도당할 정도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그것이 부부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손상시켜 그 뒤로 고드윈은 죽을 때까지 가난과 냉대 속에서 살아가 죽어야 했고, 울스턴크래프트와 함께 오랫동안 잊혀졌다. 
아나키즘과 페미니즘의 운명도 그들의 짧고도 슬픈 결혼생활을 방불하게 했다. 페미니즘은 아나키즘을 성의 차원에서 바라본 것이니 본질을 같이 하는 쌍둥이 남매라고 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아나키즘과 유사하되 본질을 달리하는 이복형제라고 할 수 있다. 모두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18세기 말에  비롯되었으나, 마르크스주의는 국가주의 체제로 나타난 수용소군도의 표어로 전락했다.  

고드윈의 아나키즘
1793년에 나온 고드윈의 대표작인 <정치적 정의>는 우리말로는 2세기 뒤인 1991년에 번역되었지만 번역서로 558쪽에 이르고 내용도 난해만 만큼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정치적 정의’는 “도덕성과 진실의 원칙을 공동체의 실천에 도입하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그 책은 국가, 사회, 도덕의 원칙에 대한 탐구였다. 고드윈에 의하면 국가는 그 원리와 실천에 있어서 모두 악이다. 그는 입법도 행정도 부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실제로 특정 개인에게 권력과 특권을 부여하여 “부는 탁월한 것이라고 하는 환상을 크게 강화하는 것”이 정치제도의 본성이라고 하여 재산과 권력이 밀접하게 관련됨을 최초로 명백하게 밝혔다.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는 에드먼드 버크의 <자연적 사회에 대한 변호>(Vindication of A Natural Society, 1756)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아나키스트 사회의 작동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으로 끝난다. 버크는 자연적 사회에 대한 변호가 기존의 국가와 사회를 부정하는 것으로 비판하면서 혁신적 변화와 급진적 경제 개혁은 기존 질서의 파괴와 혼란만을 초래할 뿐 실익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고드윈은 사회는 본래 자연스럽게 발전하므로 국가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 비로소 제대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민중의 자연적 본능을 신뢰하지 않고 해방을 위한 교육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그는 계몽주의적이었고 그런 점에서 공리주의자이기도 했다. 아나키 사회에 도달하는 것은 교육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국가교육을 거부한 그는 작은 토론집단과 같이 규모가 작고 독립한 학교가 바람직하며 개인교육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또 고드윈은 계몽주의자들처럼 기존의 모든 정치, 사회 및 종교를 완전히 전복하고자 했지만, 조용한 토론이 모든 변화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것이라고 믿고 처음부터 끝까지 폭력에 반대했다. 버크와 페인의 논쟁 이후에 나온 고드윈의 저술은 두 사람의 극단 사이에서 중용을 취한 것으로 환영받았다. 
고드윈은 민주정치가 군주정치나 귀족정치보다는 우월하지만, 정치적 정의, 즉 진리의 힘과 성실의 가치에 대한 정당한 의식을 결여하여 참된 사회정의의 조건을 결코 산출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거대하고 복잡한 중앙집권화 국가는 인류의 이익에 유해하고 불필요하므로 국가를 해체하여 지역단위의 관리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나아가 그러한 지역단위에서는 사람들 모두가 관리에 참가하므로 입법은 거의 불필요하고, 관리도 정보제공에 관여하고 실제적인 사무의 주선에 그 기능이 국한되며, 오직 정의에 반하는 범죄를 다루고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배심법원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비상시에는 지역단위를 초월한 전체회의가 필요해지나 그 위험성은 언제나 주의되어야 한다고 그는 우려했다. 
고드윈에 의하면 모든 사람의 권리는 “인간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는 모든 물질에 대한” 모두의 권리는 정의에 의해서만 규제되어야 하고, 그 물질은 그것을 가장 원하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따라서 그의 결론은 공산주의였다. 고드윈은 재산 없는 이상사회를 농경사회에서 생각한 점에서 선배인 윈스턴리, 그리고 후배들인 윌리엄 모리스와 피테르 크로폿킨과 같은 아나키즘 사상의 맥락을 형성했다. 그는 후세 아나키스트들과 같이 사치가 없는 간소화된 생활을 주장했다. 그가 추구한 이상상태는 정신의 독립과 정신의 활기를 갖는 상태이다. 고드윈은 사람들 사이의 교제는 솔직한 대화와 사고의 교환에 의해 사상을 성숙시키고 성격을 형성하는 데 필요하지만, 그것은 소유에 의한 인간관계를 배제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유에 의해 그는 과거의 선택에 영원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이자 ‘최악의 재산’인 결혼을 부정했다. 남녀는 평등한 존재로서 우애 속에서 생활하고, 인류의 증식은 ‘이성과 의무의 지시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도 양친과 교사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드윈의 영향과 평가
1798년에 토마스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가 ‘사회의 완전성’에 대한 고드윈의 견해에 대한 응답으로 <인구론>을 썼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책에서 맬서스는 풍요한 시기에 인구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고 식량부족, 질병 또는 전쟁과 같은 원인으로 인한 고통만이 인구 증가를 막는다고 썼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적어도 사회의 빈곤층에 의해 고통이 느껴질 때까지 인구는 항상 증가하고 결과적으로 빈곤은 불가피한 사회 현상이었다. 그는 고드윈이 말한 이상적인 조건 하에서 인구는 25년마다 두 배가 될 수 있으나, 식량 공급은 50년 동안 같은 비율로 계속 배가 될 수 없다, 즉 식량 공급은 증가하는 인구에 적응할 수 없다고 보았다.  
<정치적 정의>에서 고드윈은 자신이 계획한 생활수준의 증가가 인구 압력을 유발할 수 있음을 인정했지만, 고통을 피하기 위한 명백한 해결책으로 지적인 쾌락의 발달에 의한 성에 대한 욕구의 감소를 들었다. 1798년에 맬서스는 그러한 인간 본성의 변화를 거부했으나, 두 번째와 그 이후의 판에서는 광범위한 도덕적 구속, 즉 결혼의 연기와 혼전금욕(성욕 절제)은 고통이 느껴지기 전에 인구증가의 경향을 줄일 수 있다고 수정했다. 또한 고드윈은 인간이 미래에 더 지적으로 발전된 존재로 변화하는 데 새로운 기술이 부분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고, 기술 발전의 증가로 인해 개인이 생산 및 노동에 소비하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보고 이러한 도덕적 개선이 인구증가를 능가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주장은 1820년에 고드윈이 쓴 에세이에서도 반복되었다. 
고드윈은 <정치적 정의>에 버금가는 저서를 다시 쓰지 않았고, 인간이 강력한 권력에 ㅤ쫒기는 카프카적 추적의 이야기로서 정치소설과 사상소설의 선구가 된 소설 <있는 그대로 또는 게일렙 윌리엄즈의 모험>(Things as They Are; or, The Adventures of Galeb Williams, 1794) 외에 이렇다 할 문학 작품도 남기지 못했다.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무시되었으나 20세기 후반에 와서 여러 작가들에 의해 현대문학의 불안이라는 개념을 선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재평가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된 영향은 역시 <정치적 정의>의 그것이다. 그의 이론은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나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 사우디(Robert Southey, 1774-1843), 셸리 등과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의 지지를 받았고, 특히 셸리는 최초의 아나키스트시인이 되었다. 고드윈과 같이 프랑스혁명에 공감한 워즈워드는 <정치적 정의>가 출판되자 대학생들에게 “화학책을 불사르고 고드윈의 필연론을 읽어라”고 외쳤다. 그의 <서시>(Prelude, 1805)는 고드윈의 영향을 받았으나, 시대의 보수화에 따라 곧 정치적 관심을 버리고 보수화되었다. 그러나 평생 고드윈과의 우정을 유지했다. 
그 시인들의 보수적이고 신비적인 경향은 고드윈의 것과는 달랐으나, 예컨대 콜리지의 경우 권리보다 의무에 근거한 정치철학, 국가권력의 부정, 신탁으로서의 소유관념, 이익의 인위적 일치의 부정, 정신적 변혁, 계몽의 강조 등에서 고드윈과 생각을 같이 하여 평생 친구로 지냈으며 그의 매개로 J. S. 밀은 쾌락의 질적 차이, 의무감, 자연스러운 도덕 기능, 개인의 판단을 강조하여 공리주의를 수정하고 고드윈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셸리는 고드윈의 딸과 도망을 쳤고 고드윈은 그에게 엄청난 빚을 졌다는 개인적인 악연에도 불구하고 고드윈의 사상에 공감하여 그가 쓴 대표적인 시들은 모두 <정치적 정의>를 시로 표현했다는 평을 들었다.   
나아가 고드윈 사상은 19세기말에 유토피아에 입각한 윌리엄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소식>(News from Nowhere), 오스카 와일드의 <사회주의 아래 인간의 영혼>(The Soul of Man under Socialism), 그리고 20세기 초엽에 조지 버나드 쇼의 <메더셀러에 돌아가라>(Back to Methurselar)와 H. G. 웰즈의 <신과 같은 사람>(Men Like Gods) 등의 작품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에 대한 영향은 로버트 오웬(Robert Owen, 1771-1858)의 전국노동조합연합(Grand National Consolidated Union) 운동 등으로 나타났고, 칼 마르크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고드윈은 도덕적 설득과 비폭력의 소극적 저항을 폭력적 저항보다 우월시한 점에서 프루동과 톨스토이의 선구가 되었다. 또한 그는 진리의 추구에 눈 뜬 사람들의 자유로운 토의집단 형성을 제안했으나, 그 경우에도 사상의 획일성을 초래하는 시도는 회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도 아나키스트적 조직형태를 최초로 구상했다. 고드윈처럼 아나키스트들은 참으로 보기 드문 왕성한 정신력으로 모든 권위와 처절하게 격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앙에도, 전통에도, 가족에도, 사회에도, 여론에도, 시대추세에도 맹종하지 않은 참된 자유인들이었다. 정신의 자유를 철두철미 추구하고,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무시하는 사회에 사는 것은 노예와 같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런 정신의 드라마를 경험했는가? 국가나 정치, 또는 종교와의 대결은커녕 그냥 무관심으로부터 냉담한 사상의 빈곤상태는 아닌가? 우리는 체질적으로 자유에 대한 불감증, 자유의 가치에 대한 둔감증에 젖어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자유를 투쟁으로 구체화하지 못하고 그냥 유행어처럼 흥얼거리는 것은 아닌가? 인간존중이니 인명은 지구보다 중하다고들 하나 그것은 누구나 말하기에 자신도 안심하고 그냥 말하는 것은 아닌가? 시대풍조의 변화에 따라 그냥 흔들리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민주주의도 사회주의도 그냥 바람결에 나부끼는 깃발 같은 것이 아닌가? 어떤 주의주장을 펼치던 간에 진지한 사상적 대결을 결여한 빈약한 정신풍토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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