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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학문: 매체학
새로운 학문: 매체학
  • 이기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 승인 2003.09.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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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식론적 지평.. 기술-윤리 결합점 겨낭
이기현 /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책임연구원 , 사회학

이 기고란이 ‘새로운 학문’을 소개하는 지면이라는 점에 난감함을 느낀 건 사실이다. 평소 필자가 즐기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Il n'y a rien de nouveau au soleil )'라는 경구를 떠올리면서. 최근에 소위 ’뜨고‘ 있는 분야를 말하는 경박한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적어도 우리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경계를 넓은 아량으로 무시한다면, 필자는 이를 인간학(les sciences de l'Homme)이라 부르고 싶다. 인간과 인간사회를 이해하는 다양한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학문 분류나 대학의 학과 구분일 것이고, 따라서 이들을 통칭하여 인간학이라 부른다해서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기에서 말하는 ‘매체학’은 21세기적 인간학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매체학에서 이해하는 ‘매체적 인간’은 매우 모순적인 위상을 지닌다. 그 어원적인 의미(mediare)부터가 그러하다. 매체(말, 그림, 문자에서 인터넷이나 모바일폰, DMB까지)를 경유하지 않는 의사소통은 애초부터 인간에게 가능하지 않으며, 사회관계라는 것도 매체를 통한 의사소통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매체화는 인간 관계에 기술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그 관계를 분리하고 소격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물론 미디어에 대한 관심은 그동안 커뮤니케이션학이나 미디어 연구의 테두리 속에서 꾸준히 발전해 왔으며, 최근의 뉴미디어에 대한 연구까지 지난 세기를 거치면서 많은 성장을 이룬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매체를 다시 새로운 연구의 대상으로 거론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미디어 연구'로부터의 패러다임 전환

지면이 부족한 관계로 장황한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요컨대, 이 ‘새로운’ 대상으로서의 매체는 사회과학의 한 특수 영역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제한된 성격을 이미 벗어났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이다. 현란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복합화된 기술매체는 이제 우리의 삶의 양식을 규정하고 그 내용을 충족하는 단순한 기술적 수단(Tékhnē)으로서의 속성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 기술 그 자체가 문화가 되는 이 상황에 대한 자각은 이미 H. Innis나 M. McLuhan 이래로 이제 많은 학자들이 공유하고 있지만, 기술과 문화의 융합이라는 이 시대적인 현상에 대한 탐구에는 지성사의 또 다른 맥이 관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는 담론과 지식에 대한 물질주의적 또는 정치사회학적 접근(M. Foucault, P. Bourdieu)이나 인간과학의 통합을 강조하는 복합적 사고(E. Morin)의 영향도 보인다.

필자가 사용하고 있는 미디올로지의 개념과는 다소 다른 시각에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강조하는 학자로서 레지스 드브레(R. Debray)를 들 수 있다. 그의 미디올로지('매개학'으로 번역되기도 함)는 기존의 커뮤니케이션 개념이 간과하고 있는 시간과 역사성을 포괄하는 트랜스미션(전달 또는 전수)의 개념을 강조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의 미디어 연구에 전제되어 있는 공간성과 동시대적 시간 단위를 넘어서서, 장기간에 걸친 기술문명의 진화와 문화변동의 축적과정을 매체연구의 틀 속에 용해시키고자 한다. 물론 그의 이론에 대해선 앞으로 좀더 엄격한 학문적 검증과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필연적으로 기술과 윤리가 결합되는 지점을 향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상화작용성의 변화양식 분석에 유용

매체학이 탐구해야 할 주제는 산적해 있다.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우선 상호작용성(interactivity or quasi-interactivity)의 연구가 있다. 인간-인간, 인간-기계, 인간-기계-인간, 또는 인간-기계-환경(네트워크)으로 점차 확장되고 있는 상호작용성의 변화 양식에 대한 탐구는 앞으로 인간/기술의 관계나 사회조직과 제도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주제가 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체성’(identité) 연구 역시 집단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정체성의 ‘탈지역화’라는 주제로 이행하면서 ‘인간화’(hominisation)에 대한 재정의를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관심은 피에르 레비(P. Levy)가 '가상성'(virtualité)을 통해 존재양식의 전환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집단지성'(intelligence collective)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처럼 매체학의 시선은 수많은 개방형 질문들을 생산해 낸다. 매체학은 새로운 학문이 아니라 새로운 인식론적 지평을 의미한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국립 파리 제7대학에서 이데올로기 분석을 위한 이론적 방법론적 연구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회이론 및 미디어 관련 다수의 논문을 발표해 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미디올로지: 사회적 상상과 매체문화'(한울, 2003)를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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