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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리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원 석학초청강좌- 팔레교수
쟁점리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원 석학초청강좌- 팔레교수
  • 박현모 정문연
  • 승인 2003.09.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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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교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재인식

박현모/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치학 

“지금 한국은 유서 깊은 강대국 의존정책을 지속하거나, 아니면 미국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서있다.” 이라크파병문제로 장안이 술렁거리고 있는 가운데 제임스 팔레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미 워싱턴대)은 “한국은 역사상 가장 위험한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다”면서, “역사적으로 여러 번 성공을 거두었던 한국의 강대국 의존정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광해군의 외교노선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 집중강좌’의 네 번째 바통을 이어받은 팔레 교수는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꽉 찬 대형강의실에서 ‘고립’과 ‘의존’이라는 남북한의 대조적인 외교패턴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해 오늘날 한국 외교의 딜레마와 해법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북한의 ‘강성대국노선’은 폐쇄를 통한 자기보존, 무력과 맹렬한 독립성이라는 측면에서 독재적인 수상 연개소문 치하의 고구려의 외교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강대국 미국에의 의존을 통해 안보와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되 자주적 정책결정권을 희생시켜온 남한의 ‘동맹노선’은 7세기 중반의 신라와 유사하다.

그런데 북한의 ‘고립정책’이 1953년 이래 지속돼 온 미국의 ‘봉쇄정책’ 앞에서 무기력한 것처럼, 남한의 ‘의존정책’도 부시행정부의 대북 강경노선과 남한 내 반미정서 형성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즉 조선이 자존심을 꺾고 “명의 군사력의 우산에 들어가 2세기 동안의 평화를 유지했던” 것처럼, 한국은 강대국에 대한 묵종과 복종을 통해 자기 보존의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 연개소문의 고구려, 인조정권 하의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적 재난을 초래할 수도 있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국가적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다.

팔레 교수는 여기서 “제3의 길,” 즉 과거 명나라가 신흥 세력인 만주족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파병을 요청했을 때, 광해군이 “묵종과 대항”을 넘어선 제3의 길을 통해서 위기를 넘겼던 것에서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오늘날의 제3의 길은 “한반도의 평화유지를 바라는 미국인들과 남한의 정부․시민대표로 구성된 공개논의 모임”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80여 명에 달하는 미국 내 한국사 연구자들이 수행해온 연구주제를 시대별로 축약하여 소개해준 첫째 날 강의 역시 매우 유익했다. 즉 삼국시대(6명), 고려시대(5명), 조선전기(22명), 조선후기(23명), 식민지시대(17명), 해방이후(12명+α)의 연구자들의 분포에서 나타나듯이 미국 내 한국사 연구는 비교적 폭넓게 진행되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제한된 시간(2시간)을 늘 초과하면서 진행된 열띤 토론에서 새삼 확인된 것은 조선시대에 대한 국내외 연구자들의 극명한 시각차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노예제 사회론’ ‘실학의 근대성 문제’ ‘조선왕조 장기지속성 요인’ ‘조선 정치사상에 대한 인식차’ 등을 들 수 있는 바, 여기서는 마지막 쟁점에 대해서만 요약하고, 간단히 필자의 생각을 덧붙이고자 한다.

팔레 교수는 조선 정치사상이 시간이 흐르면서 ‘발전’되기는커녕 오히려 ‘쇠퇴’ 내지 ‘변질’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퇴율성리학’ 이후 조선 유학이 ‘심화’되고 ‘순정화’되었다고 보는 국내의 여러 학자들의 시각과 대조된다. ‘유교적 경국책’을 중시하는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제도’보다는 ‘인성’의 규명에 치우친 사상적 풍토는 확실히 조선의 건국이념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유교와 성리학을 거의 구분하지 않고 있는 데, 조선의 유학사상을 너무 단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게 아니냐”라는 비판을 받았다. ‘성리학의 심오한 철학을 잘 모르는 게 아니냐’는 이 같은 비판에 대해서 팔레 교수는 구체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필자는 이와 관련해 퇴율성리학 이전의 사상을 조악하고 세련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는 종래의 학자들과 달리, ‘유교적 경국책’이라는 관점에서 조선전기의 정치사상을 재평가하려는 팔레 교수의 시도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른바 ‘훈구파’의 여러 가지 경국책을 도학적인 잣대로 매도해온 ‘사림파’ 중심의 시각을 넘어설 때 조선 전기의 온전한 정치사상, 특히 세종조의 균형 잡힌 정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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