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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 교수신문
  • 승인 2019.12.0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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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머나먼 | 저자 최승자 | 문학과지성사 | 페이지 107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상태다. 청춘이 영원히 계속될 수 없는 것처럼, 시인이라는 상태 역시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 그리하여 모든 시인은 어느 순간부터 시인이기를 그친다. 그는 직업을 갖고 ‘생활인’이 되며, 서서히 그 직업에 흡수된다. 아니면 그는 ‘원로시인’이 된다. (원로시인과 시인은 오리너구리와 너구리처럼 별개의 종에 속한다.) 그는 선생님이라 불리고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고 새로 등단한 젊은 시인들에게서 술잔을 받는다. 신년을 축하하는 장시를 일간지 1면에 싣고 시국에 대해 논평하고 시국선언을 하기도 하며 한국문단을 대표하여 한국문학에 대해 발언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마침내 행복해진 것을 기뻐하면서, 빛바랜 시집을 재활용품 더미에 넣는다. 청춘의 기억과 함께....

요절하지 않은 시인들을 운명처럼 기다리는 이 과정을 최승자는 겪지 않았다. <연인들>을 마지막으로 문단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주 조용히 사라졌기에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서점 한 구석에 여전히 <즐거운 일기>가 꽂혀 있었고, 원한다면 그것을 사서 생일을 맞은 친구에게 선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천년의 떠들썩함 속에서 그런 추억들은 빠르게 희미해졌다. 

오래된 유행가 가사처럼,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고 마음에 담았던 말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거나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별’ 같은 구절. 술을 마시면 떠오르고, 가만히 되뇌면 문득 슬퍼지는, 나를 위한 노래 같았던 그녀의 노래. 우리는 그녀를 잊었고, 그녀 없이 시대를 통과하는 데 익숙해졌다. 사실 지나치게 긍정적인 2000년대와 그녀의 시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녀의 오랜 부재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 세월 동안 그녀는 어디에 있었던가? 동료 시인들이 생활인이 되고 원로시인이 되는 동안? 우리는 뒤늦게야 듣게 된다, 시인의 고독과 가난과 병마에 대해, 폐쇄병동에서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해. 

 

자본도 월급도 못 되었던

내 시간들은 다 어디 가고

나도 아닌 나를 누군가 흔든다

나는 내가 아닌데 누군가 나를 흔든다

조용히 흔들린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그녀가 언제부터 광기와 싸우고 있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초기작에서부터 이미 그녀의 시에는 광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나 실비아 플라스처럼, 그녀는 광기와 예술 사이의 좁은 경계를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서 그녀는 길을 잘못 들었고, 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토로 들어가버렸다. 

정신분열병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환상이 현실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어와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것이다. 친숙한 것,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주체는 폐허가 된 세계 속을 홀로 헤맨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들려오는 유령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지만 이렇게 꿈을 꾸는 동안 바깥 세상에서는 계속 시간이 흘러간다. 일 년, 이 년, 삼 년... 그래서 어느 날 꿈에서 깨어난 주체는 자기가 그 사이에 하염없이 늙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친구들은 병들거나 죽었고,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집을 떠났고, 집은 낡아 허물어졌으며, 동네는 몰라보게 변했다는 것을. 신선이 준 술을 마시고 한숨 자고 나니 이십 년이 흘러갔더라는 이야기에서처럼. 

<쓸쓸해서 머나먼>은 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의 쓸쓸한 마음을 담고 있다. 그는 마침내 현실로 돌아왔지만, 현실은 꿈보다 더 낯설다. 어느 게 현실이고 어느 게 꿈인 걸까.

 

담배 한 대 피우며 한 십 년이 흘렀다

그 동안 흐른 것은 대서양도 아니었고

태평양도 아니었다 

다만 십 년이라는 시간 속을

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새 한 마리가 폴짝건너 뛰었을 뿐이었다

 

영화 <인셉션>에서는 꿈 속에서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 단계 한 단계 더 깊은 꿈에 빠질수록 더 긴 시간을 경험하는 것으로. 하지만 <립 밴 윙클> 같은 이야기들은 그 반대가 맞다고 주장한다. 꿈 속에서의 한나절이 바깥 세상의 이십 년과 맞먹는다고. 나는 두 번째가 더 진실일 거라고 생각한다. 꿈은 제자리걸음을 하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 꿈을 꾸어도, 매번 같은 곳에서 이야기가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어, 그리운 풍경,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끝내 만져볼 수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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