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23:35 (목)
저역자 다이제스트 : 『담화의 놀이들』(란다 사브리 지음 | 이충민 옮김 | 새물결)
저역자 다이제스트 : 『담화의 놀이들』(란다 사브리 지음 | 이충민 옮김 | 새물결)
  • 이충민 파리8대
  • 승인 2003.09.1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담에 새겨진 창작과 비평의 알력

이충민 / 파리8대 박사과정·불문학

기독교의 비유체계에서 신의 섭리가 언제나 王道, 태양광선, 직선으로 표현되고 그에 따라 곡선, 구불구불한 선은 악마의 것으로 여겨지는 데 반해, 이슬람의 교리에서 계시의 글은 그 자체가 '아라베스크' 문양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아라베스크는 은폐를 통해서만 작동하면서 무한성의 탐색을 계속하는 계시의 역설을 암시하며 미궁, 굴곡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관점을 문학장으로 옮겨보면 굳이 로고스 중심주의와 같은 현대적 개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러한 구도는 내러티브의 선조성에 대한 ‘직선’이라는 유서깊은 은유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이 은유는 질서, 비례, 통일성, 필연성, 경제성 등의 개념망에 연결되면서 모종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여 그에 대립되는 모든 현상을 잉여, 과잉, 일탈이라고 폄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혹은 그에 대한 경직된 해석에서 비롯된 이런 엄숙주의는 그리스-로마 시대에 수립된 수사학이라는 메타담론체제 속에서 체계화돼 소설, 비극, 서사시, 연설문과 같은 다양한 장르의 문학 실천에 영향을 끼쳐 왔으며, 수사학이 사멸한 오늘날에도, 텍스트의 해방을 부르짖는 현대 비평의 시대에도 문학 담론의 지평에 은밀히 남아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2천년의 수사학·시학 전통을 현대 서사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면서 이야기의 진행에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요소들을 '여담'이라는 범주로 묶어 검토하고 있다. 여담이란 본래 주제를 잊고 곁가지로 빠지는 것으로 일차적으로는 수다스럽고 무계획적인 글쓰기의 산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좀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거꾸로 이야기란 본시 수많은 단절, 정지, 교차, 플래시백, 선로이탈을 통해서만 전진할 수 있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담화(discours)란 이미 흐름(cours)을 끊는 것(dis)일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언어활동은 법률가의 정연한 판결문이 아니라 어디로 빠질지 모르는 잡담과 수다를 근본으로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저자는 이렇게 여담이라는 비정통적 노마드 현상을 해명하기 위해 일화, 곁줄거리, 묘사, 액자구조에서 책 속의 공란, 각주, 말줄임표에 이르는 다양한 일탈과 방황의 형식을 연구해 동일자와 타자, 중심부와 주변부, 체계와 탈주 등의 철학적 개념을 생생한 문학적 현실 속에서 되새기는 동시에, 수사학·시학이 강요하는 글쓰기 모델에 대한 작가들의 반박, 위반, 조롱을 추적함으로써 창작과 비평의, 텍스트와 주변 환경의 알력과 투쟁을 보여준다. 그리고 억지, 궤변, 속임수, 아이러니로 가득한 소란스런 싸움의 와중에 드러나는 것은 태초에 말씀이 아니라 횡설수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언어란 본래 혼성적이고 잡다한 것이 아닌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