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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 오늘 우리를 말하다
지그문트 바우만, 오늘 우리를 말하다
  • 교수신문
  • 승인 2019.11.2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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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역자 조은평, 강지은 |동녘 |페이지 400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외국 철학자 혹은 사상가도 적잖이 유행을 탄다. 데리다와 라캉은 한동안 대학 논술 답안지의 단골 인사였으며, 들뢰즈는 국내 여러 철학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역시 적잖은 시간 동안 회자되었다. 농담인 듯 농담 아닌 말로, 레비스트로스는 한 유명 청바지와 함께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렸다. 철학은 모름지기 한 시대를 풍미해야 하는데, 이제 모든 유행처럼 한때의 사건이 된 지 오래다.

여기 이 사람,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도 잠시 유행하며, 한국 사회 진단에 한몫했다. 특히 SNS가 개인의 삶과 사회의 지형을 바꾸는 세태 속에서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을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라는 지적은, 요즘 말로 ‘뼈 때리는’ 금언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 유행 역시 몇 년을 넘지 못하고 잦아들었다. 

2012년 여름 출간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지그문트 바우만 유행에 일조한 책이다. 이탈리아 주간지 <여성들을 위한 라 레푸블리카>(Ra Repubblica delle Donne)에 기고한 44편의 편지에는, 현대 사회에서 문제라고 여겨지는 웬만한 것들, 이를테면 교육, 프라이버시, 세계화, 인스턴트 섹스, 건강 불평등 등의 문제를 다룬다. 고담준론은 없다. 오로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보편의 언어로, 바우만은 곧장 핵심으로 치고 들어간다. 

알다시피 그 근저에는 바우만의 핵심사상 “유동하는 세계”가 있다. 액체처럼 “그대로 가만히 멈춰 있을 수 없고, 오랫동안 그 모습을 유지할 수도 없다”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부유한다. 진리가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들에 관해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 발버둥 친다. 진리의 낟알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그것이 무엇이든 끊임없이 접속하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바우만은 생애 후반부에 현대인의 삶의 주무대가 되어버린 온라인과 거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인생, 그런가 하면 그것으로 인해 발생한 세대차이와 인터넷이 매개하는 섹스 등 숱한 문제들에 천착했다. 곁에 있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손안의 세상 스마트폰에서 연결된, 기실 그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관심사가 같다는 이유 하나로 정서적 유대감을 피력한다. ‘좋아요’를 눌러주기를 바라며 우리는 작은 액정에 침잠하는 것이 곧 우리다. 접속하면 접속할수록 고독해지는 숙명을 알지도 못한 채, 아니 알면서도 더더욱 그곳으로 달려가고자 한다. 이어지는 바우만의 일갈은 우리 모두의 앞날 같아 섬뜩할 정도다. “‘인간 존재’라는 매우 아름다운 모습은 허물어지고 사라지는 것 같다.”

인간 존재라는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진 대표적인 현상은 아마도 불평등일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불평등의 위험성에 관한 수많은 연구와 보고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누구 하나 콧방귀도 뀌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어쩌면 체감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바우만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등 먼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는 있어도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했다고 말하지는 말라”고 경종을 울린다. 비록 복지가 좋은 유럽의 어떤 나라에 살지라도, 바다 건너의 이야기가 곧 우리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최근 불평등의 확장 속도만으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뾰족한 대안은 없다. 그래서 더더욱 “바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그러한 경고를 전혀 듣지 못했다고 말하는 일을 멈춰야 할 때”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자는 것이다. 

사회학자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상을 하나의 줄기가 형성되어 있지는 않은 듯 보인다. 제기한 문제마다 이렇다 할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일관되기 그는, 현대 세계가 격동의 시공간이며, 그 속에서 우리 모두는 아노미적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불안과 공포라는 두 단어 속에 현대인들의 삶의 행태가 녹아 있다고 보았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행은 어느덧 사라졌고, 그도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펼치는 이유는, 그가 보여준 현대인의 삶의 모습이 더도 덜도 아닌 꼭 내 모습 같기 때문이다. 

장동석 <뉴필로소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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