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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돕는 일은 큰 기쁨”… 서울시 올해의 명예시민 ‘김에델’ 교수
“아이들 돕는 일은 큰 기쁨”… 서울시 올해의 명예시민 ‘김에델’ 교수
  • 김범진
  • 승인 2019.11.25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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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한국인 남편 김병옥 교수 만나
1975년 남편 따라 처음 서울 온 독일인 아내
2013년 ‘샘 지역아동센터’ 설립 후 소외아동 도와
1992년 한독문학번역연구소 설립과 운영에도 큰 몫
“향후 번역문화 개선에 매진할 터”
김 에델트루트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사진=김범진 기자
김 에델트루트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사진=김범진 기자

“안녕하세요. 저는 독일 사람 김 에델트루트입니다.”

1975년 8월 남편인 고(故) 김병옥 전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를 따라 처음 서울에 온 ‘김에델’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13일 ‘서울시 외국인 명예시민’ 대표로 연단에 홀로 올라 이렇게 인사했다. 올해 만으로 일흔아홉, 서울에 온 지 어언 44년 만의 일이었다. 이를 현장에서 지켜본 최민숙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는 “학교는 물론, 교수사회로서도 매우 드물고 명예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15일, 김 에델트루트 교수를 만나기 위해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그의 집을 방문했다. 명함에는 ‘에델트루트 김’이라는 서양식 표기 대신 한국식 ‘김 에델트루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키며 “에델트루트라 부르지 말고, 김에델”이라 부르라 했다. 그가 한국에 오자마자 의료보험회사에서는 그의 이름이 ‘한국에서는 너무 긴 이름’이라는 지적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 ‘김에델’로 줄여 쓰기 시작한 것이다. 방문 전 그의 집 1층 프런트 데스크에서도 “김에델 선생님”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김 에델트루트 명예교수와 박원순 서울시장. 사진=권선형 한독문학번역연구소 사무국장(숭실대 독어독문학과 초빙교수) 제공.
김 에델트루트 명예교수와 박원순 서울시장. 사진=권선형 한독문학번역연구소 사무국장(숭실대 독어독문학과 초빙교수) 제공.

서울시는 13일 오후 서울 태평로 시청 다목적홀에서 ‘2019 서울시 외국인 명예시민의 날’ 행사를 열고 교육과 문화 교류, 봉사 활동 등으로 시에 공헌한 14개국 외국인 18명에게 서울시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시에서 그중 김에델 교수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한 가장 큰 이유는 ‘샘 지역아동센터’의 설립과 후원이다. 김에델 교수는 김병옥 교수와 함께 2013년 8월 서울 은평구에 27번째로 소외계층 어린이들을 위한 지역아동센터를 개원한 후 지금껏 아동복지를 후원해오고 있다. 가장 처음 도움을 받았던 아이들은 이제 중학생으로 자라 있다. 개원 당시에는 교수신문에서도 남편인 김병옥 교수와의 인터뷰를 실은 바 있다. “당시도 남편이 몸이 좋지 않아서 인터뷰를 할지 말지 고민을 했었다”고 김에델 교수는 회상했다.

“우리 김 선생이…” 김에델 교수가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혼자 고민을 하다가 어느 날 불쑥 (샘 지역아동센터 설립) 이야기를 꺼내더라.” 여러 좋은 일 중에 왜 아이들을 돕는 일을 선택했을까. “아마도 아이가 없어서였던 것 같다”고 아내는 말했다.

김병옥 교수의 제자로서 오랫동안 이들 부부를 지켜본 권선형 한독문학번역연구소 사무국장(숭실대 독어독문학과 초빙교수)은 “김에델 교수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지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며 ”대개 독일인이 그렇듯 검소하고 소탈하며, 사회 정의와 공평한 사회 등에 대한 좋은 감각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에델, 김병옥 교수 부부가 2013년 개원한 샘 지역아동센터. 사진=최민숙 이화여대 명예교수 제공.
김에델, 김병옥 교수 부부가 2013년 개원한 샘 지역아동센터. 사진=최민숙 이화여대 명예교수 제공.

아동센터 건립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처음부터 재정적인 것이었다. 김에델 교수는 “재정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좋다”고 동의했다. 권선형 사무국장은 “지역아동센터 설립에는 김병옥 교수께서 주도적 역할을 했지만, 큰 돈이 들어가는 일이니 부부가 같이 상의를 했다”고 했다. 연배가 부인보다 많고, 노년에는 건강도 좋지 않았던 김병옥 교수는 본인 사후에도 아내가 경제적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부부는 완전히 이성적으로 계산에 계산을 거듭했고, 그 결과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해 아동센터를 건립하게 됐다.

부부는 샘 지역아동센터에 7억 5천의 건물 매매비용과 2년간의 자립운영비, 각종 행사에 필요한 경비와 물품 후원을 했다. 일반적으로 상가에 설립되는 경우가 많은 타 지역아동센터와 달리 샘지역아동센터는 2층 가정집으로 마당과, 화초 등을 심은 작은 정원도 있다. 이곳 시설장인 지정의 씨는 “아이들에게 집보다 더 좋은 장소가 됐다. 아이들은 센터에 오면 가장 편안하고 즐겁게 활동하며 ‘센터가 집보다 더 좋다’, ‘집에 가기 싫다’ 같은 말을 했다. 아이들이 센터에서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며 두 분이 흐뭇해 했다”고 전했다.

“아이들을 돕는 일은 남편과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고 김에델 교수는 말했다. 남편이 몸이 아파 오랜만에 센터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센터의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갑자기 두 분께 가서 ‘교수님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라고 말을 했다. 김병옥 교수께서 그 이후로 몇 번씩이나 그때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이 두 분께 의외이면서도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두 분을 어려워하지 않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고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대화도 하며 지냈다. 그러한 시간들이 두 분께 다른 곳에서는 받을 수 없는 힘과 기쁨이 되었을 것”이라고 지정의 씨는 덧붙였다.

2015년 새로 마련한 샘 지역아동센터의 모습. 사진=최민숙 명예교수 제공.
2015년 새로 마련한 샘 지역아동센터의 모습. 사진=최민숙 명예교수 제공.

서로가 평생 돈 문제로 다툰 적은 없었다고 아내는 회상했다. 권 사무국장은 “부부는 재산이 있었지만 검소했다. 본인들을 위해서는 돈을 많이 쓰지 않았다. 대신 사회에 환원해서 의미 있게 쓰이면 좋다고 생각했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이 되면 큰돈을 선뜻 내놓고는 했다”고 덧붙였다.

김에델 교수와 김병옥 교수는 어떤 부부였을까. 아내는 ‘모든 면에서 파트너십이 지배하는 동반자 관계였다’고 회상했다. 큰 문제가 있을 땐 늘 의견의 일치를 보았기에 크게 다툰 일도 없었다. 권선형 사무국장의 전언이다. “요즘 여자들과 달리 조선 시대 여자 같다고 할까. 독일어로 매일 하시는 말씀이 ‘하늘 같은 남편’이었다. 두 분이 나이 차도 있었고, 남편께서는 카리스마도 있었다. 사모님은 김병옥 선생님이 워낙 훌륭한 분인 걸 알기 때문에 잘 따랐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남편이 혼자 하지 않고 두 분이 같이 했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거의 없었다. 식사도 문제가 별로 없었다. 식사는 독일에 있을 때부터 한국음식과 독일음식을 반반 정도로 했다고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내에게 생선 등 해물 알레르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내는 그래도 독일에서는 남편을 위해 생선 등 해물 요리를 종종 밥상에 올렸다. 

아내가 생선과 해물을 들지 못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한국에서는 소고기나 돼지고기로 찌개를 끓이지 않으면 대개 멸치 수프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김에델 교수는 지금 머무는 실버타운에서도 소고기국이나 돼지고기 찌개가 나오면 너무나 행복해한다.

최민숙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과거에 전해 들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했다. “남편 김병옥 교수가 밖에서 고기 드시면서 생마늘을 들고 귀가하신 경우 마늘 냄새 때문에 곁에서 잠을 잘 수가 없으시다고 했다. 해결책을 발견했는데 그럴 때는 당신도 부엌에 가셔서 생마늘을 먹고 들어오면 편하게 잘 주무실 수 있다고 했다.”

아내는 남편과 독일 본 대학에서 만나 1966년 결혼한 뒤, 2015년 남편인 김병옥 교수가 작고하기 전까지 48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다.

부부는 원래는 독일에 살 생각이었다. 그랬던 이들이 한국에 오게 된 건 남편이 한국에서 교수로 임용되면서다. 서울은 그사이에 김에델 교수의 두번째 고향이 되었다. 아내는 과거를 회상했다. “처음 한국에 왔던 1975년에 서울의 지하철은 1호선뿐이었다. 2호선은 계획 중이었다.” 오늘날 서울의 지하철이 세계 최고로 손꼽히게 된 것을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버스는 항상 만원인 데다 고장이 잦았다. 그런 버스가 무서워서 브리사 택시나 포니 택시를 탔다. 하지만 지금은 지하철을 열심히 이용하고 있다.” 그 후에도 옛날이야기는 ‘한강다리’로 한참을 이어졌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모습은 오랜 세월 한국에서 살아온 한국 노인의 모습과 영락없이 같았다.

부부는 지역아동센터 건립 외에도 많은 일을 해왔다. 1992년 설립한 재단법인 한독문학번역연구소의 활동이 그것이다. 한독문학번역연구소는 격년으로 한해는 국내학술대회, 다른 한해는 한·중·일·독에서 외국 손님을 초대해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해왔는데, 이때마다 준비와 진행 과정에서 아내의 역할이 컸다. 한독사전 작업 중에는 어떤 단어 항목을 작성할 때면, 아내는 원어민으로서 내용을 꼼꼼히 보고 최종 승인을 하는 역할을 해왔다. 지금은 원어민 네다섯명이 그 일을 함께 하며, 아내는 남편을 대신해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현재 한독문학번역연구소는 ‘선광한독사전’을 편찬하고 있다. 선광이라는 이름은 남편인 김병옥 교수의 호에서 따왔다. 지금까지 완성된 일부 단어들은 연구소 홈페이지와 네이버 사전 페이지를 통해 누구든 이용할 수 있도록 선보이고 있다. “연구소를 설립한 1992년에는 강사들이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다. 월급을 많이 줄 수는 없었지만, 강사들이 같이 보람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아내는 소회를 밝혔다.

한독문학번역연구소는 지난 9월부터 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서울대 독일어문화권연구소와 함께 기획한 ‘독일문학번역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번역비평’ 작업이 그것이다.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앞으로 6년간 지원을 받는다. 권선형 사무국장은 “번역의 질도 높이고 독자들에게 좋은 번역을 소개하는 등 번역문화 개선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큰 기대를 내비쳤다.

김범진 기자 ji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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