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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 - 중세와 르네상스의 아나키스트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 - 중세와 르네상스의 아나키스트
  • 교수신문
  • 승인 2019.11.15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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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반아나키즘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의 기독교를 초기 기독교라고 한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평화주의를 관철했다. 이는 2세기 후반에 그리스의 셀수스(Celsus)가 기독교인들의 군복무와 전쟁 반대는 제국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비판한 것에서 볼 수 있다. 또 258년에 순교한 키푸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 200?~258)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범죄로 간주되지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살인은 용기로 간주 된다”며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나 전쟁을 비판했다. 4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40)에 의하면 막시밀리안(Maximilian)이라는 21살의 누미디아 출신의 청년이 군복무를 거부한 이유로 295년 3월 12일 사형에 처해졌다. 3세기의 한 교회법에 의하면 목사로서 동시에 직업군인이나 이발사, 수술의사, 대장장이의 일을 겸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앞의 직업들이 피를 보는 직업이기 때문이고 대장장이는 그들의 도구를 만드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기독교의 아나키즘은 4세기 이후 없어졌다. 

키푸리아누스
키푸리아누스

가톨릭의 성자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인간의 동물적 본능인 원죄를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고 본 점에서 루터와 칼뱅, 19세기말의 사회적 진화론, 그리고 20세기의 전체주의나 보수주의와 같은 반(反)자유주의를 끝없이 되풀이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그는 노예제도와 전쟁 및 사형제도도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했고, 기독교가 너무나 유약하여 남성답지 못하고 여성화되었으며 피가 부족하다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삼아 징벌 원정과 대학살에 나서는 것을 합리화했다. 게다가 교황청의 박해는 사랑으로 하는 것이므로 정당한 것이지만, 교황청을 반대하는 자는 악마에 씐 자이므로 박해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을 구별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와 근대 사이에 있었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도 마찬가지였다. 아퀴나스는 신분은 신이 내린 것이라는 이유에서 사회적 불평등과 착취체계를 축복했다. 나아가 유일신과 마찬가지로 1인 왕의 지배가 최선의 통치형태라고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전제로 흐를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통치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를 위한 어떤 제도나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퀴나스는 이단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노예제를 긍정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에서 보듯이 중세 기독교는 철저히 반아나키즘적이었다. 가톨릭에 대한 반대세력은 이단으로 박해받았다. 그런 이단 박해의 정당화는 지금까지도 가톨릭의 역사에 화려하게 서술되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물론 중세 기독교의 역사에는 반아나키즘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종래 주류의 교리신학적 전통과 대립되는 신비신학 내지 영성신학적 전통도 존재했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권위에 대한 반발로 그친 영성신학은 아나키즘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의 반체제를 포함하지 못하고 교회 내부의 권위에 저항하는 신학을 아나키즘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가령 한국의 유영모나 이용도를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없다. 도리어 중세 이탈리아의 수도자인 조아키노 다 피오레(Gioacchino da Fiore, 1135~1202)의 천년왕국설이 후대의 아나키즘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즉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교회가 되고, 예수의 산상설교가 온전히 성취된다고 본 조아키노의 지상왕국 관념은 관념론과 공산주의의 유토피아 사상, 심지어 나치의 제3 천년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성 프란시스코와 동시대 인물로 성 프란시스코가 물질과 세속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극단적인 청빈을 선택한 반면 노아키노는 인간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약속한 것이었다. 

조아키노 다 피오레
조아키노 다 피오레

그노시즘

영지주의라고도 번역되는 그노시즘(Gnosticism) 또는 그노시스파는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과 사상이 활발하게 융합한 헬레니즘 시대에 유행했던 종파의 하나로, 육체를 부정하고 영혼을 긍정하는 이원론과 개인적인 깨달음을 통한 구원을 주장한 점에서 기독교와 근본적으로 달라 이단으로 비난 받고 3세기경 쇠퇴했으나, 그 후에도 다양한 종파의 교리와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19세기의 낭만주의(블레이크, 노발리스, 괴테, 위고)와 상징주의(보들레르, 랭보)와 초현실주의(브르통), 쇼펜하우어, 멜빌, 예이츠, 20세기의 융, 헤세, 카뮈, 긴스버그 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아브라삭스(Abrasax)는 그노시즘에서 말하는 선악을 동시에 가진 신을 뜻했다.  

그노시스(Gnosis)는 지식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물질적이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뜻했다. 이러한 지식을 개인적으로 이해하면 인간은 육체를 초월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구원에 대한 그노시스파의 핵심 사상이었다. 또한 그노시스파는 세상에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고 선한 신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지식 등 영적인 것이 나오고 악한 신에게는 악의 근원이 되는 모든 물질적인 것이 나온다고 여겼다. 따라서 인간의 선한 영혼이 죄악으로 물든 육체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노시스파에게는 정통 기독교가 내세운 예수의 육화(肉化)나 부활 또는 육체의 고통을 통해 인간의 원죄를 대신 받으려 했던 점 등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단시되었다. 기독교가 그리스도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인간의 원죄를 대신 속죄하였다고 믿는데 반해 그노시스파는 육체는 그 자체가 악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육화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또 개인적인 깨달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그노시즘의 사상도 교회 성직자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그 지위를 끌어내릴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노시즘은 카타리파(Cathar)에 영향을 주었다. 알비파나 순수파라고도 하는 그것은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프랑스 남부의 알비와 툴루즈를 중심으로 생겨난 기독교 교파로 그 교리는 이원론과 그노시즘에 입각하여 삼위일체를 부정한 탓으로 가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이 결성되어 그들을 멸망시켰다. 카타리파는 발적인 빈곤, 빈민과 병자의 구호, 종교적 헌신을 통해 예수의 생애를 본받고자 한 베가르도회(Beghards)나 베긴회(Bguines) 같은 남여 평신도단체에도 영향을 주었다. 같은 평신도 그리스도인 운동으로 ‘자유정신의 형제회(Brethren of the Free Spirit)’ 또는 ‘자유정신의 형제 자매회(Brothers and Sisters of Free Spirit)’가 있었고 그들의 가르침은 16세기 독일에서 출현한 ‘재세례파(Anabaptists)’ 교리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카타리파와 함께 활동한 발도파(Waldensian)는 12세기 말 프랑스 리용의 종교개혁가 피터 발도(Petrus Valdes, 1140?~1205?)를 통해 프랑스 남부에 세워진 기독교계 신앙공동체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여 종교재판과 십자군에 의해 이교도로 박해를 당했다. 발도파는 성경대로 살아가려 하였고 아내와 딸에게 필요한 것만 남기고는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간소한 복장으로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성자숭배, 연옥, 면죄부, 맹세, 모든 교회규정, 세속적 재판권(특히 사형제도)를 거부하여 후대의 개신교와 비슷한 교리를 펼쳐서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발도파는 카타리파와 달리 현대에도 살아남아 개신교의 개혁교회 계열에 속해 있다. 

피터 발도(페트루스 발데즈) ⓒAlexander Hoernigk /wikipedia | CC BY 3.0
피터 발도(페트루스 발데즈) ⓒAlexander Hoernigk /wikipedia | CC BY 3.0

카파리파와 발도파는 예수가 유대교와 로마제국을 공격한 것처럼 로마교회의 계급적 질서와 로마의 권력을 공격한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아나키즘적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렇게 보지 않는 입장도 있다. 

중세에는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도미니코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갈멜 수도회 같은 탁발수도회가 다수 존재했으나 이단으로 비난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13세기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갈라져 나온 프라티첼리(Fraticelli, Spiritual Franciscans)는 교회 재산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에 교황으로부터 이단 선고를 받았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에 이단 심판과 관련해 등장하는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가 바로 그들이다.

얀 후스
얀 후스 ⓒwikipedia | CC BY-SA 3.0

15세기에는 체코의 얀 후스(Jan Hus, 1372?~1415)를 중심으로 한 타보르파(Taborite, 후스파)가 등장했다. 후스 전쟁 당시 보헤미아의 타보르가 본거지였던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그리스도의 새천년이 도래했으며 종도 주인도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약속한 타보르파를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주의의 원형이라고 하고, 1830년 이후 노동자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다시 부활했다고 보았다. 타보르파는 1457년 보헤미아 형제단(Unitas Fratrum 또는 Unity of Brethren)이 탄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규준으로 삼으며 소박하고 비폭력적인 삶을 추구한 그들은 18세기 이후 모라비아 형제회(Herrnhuter Brudergemeine)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세례파

앞에서 말한 재세례파(Anabaptist, 재침례파라고도 함)는 16세기에 유아세례뿐만 아니라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세례도 무효라고 보고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순수한 자기 결단에 따른 신앙과 함께 외적 권위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 재산의 공동소유, 평화주의와 무저항, 엄격한 정교분리, 납세 거부 그리고 지도자 없는 교회를 주장했다. 특히 그들은 국가교회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모임에만 참가했고, 산상수훈에 근거하여 맹세와 군대 복무를 거부했다. 따라서 그들은 가톨릭은 물론 루터나 칼빈이나 츠빙글리 등의 개신교파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엄청난 탄압을 받았고  20세기 초엽까지 거의 무시되거나 경시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도 메노나이트, 아미쉬, 후터라이트(Hutterrites) 등으로 남아 있다. 

재세례파
재세례파

재세례파는 폭력파와 비폭력파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기 위한 폭력을 인정한 세력으로 그 대표적인 사건이 뮌스터 반란이었다. 이는 멜키오르 호프만 (Melchior Hoffmann, 1500~1543)의 종말론적 재침례관의 영향을 받아 1534년 2월부터 1535년 6월까지 18개월 동안 독일의 도시 뮌스터를 재침례파가 지배한 것이었다. 호프만은 스트라스부르에서 1530년에 성인 침례를 개시하였고, 뮌스터에 그리스도가 재림한다고 예언했으나 체포되어 옥사했다. 

반면 신약성서에 근거한 비폭력주의를 주장하는 평화주의자들은 메노나이트(Mennonites)의 기원이 된다. 메노나이트는 네덜란드의 가톨릭 신부인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 1561)가 두 부류의 전통적인 재세례파인 평화적인 오비(Obbe Philips, 1500~1568)파와 급진적인 호프만파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오비파 쪽에 가입하여 성립했다. 메노나이트는 노예제 해방운동이나 메노나이트도 병역 거부 등을 이유로 여러 나라에서 탄압을 받았다. 미국 독립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인 메노파들은 무기사용을 곧 살생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해 갈등을 겪기도 했다. 

아미시파 사람들 사진 ⓒ it:Utente:TheCadExpert /wikipedia | CC BY-SA 3.0
아미시파 사람들 ⓒ wikipedia | CC BY-SA 3.0

메노나이트는 대체로 일반인과 같은 삶을 살지만 그 분파인 아미시(Amish)는 자동차 등의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반문명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17세기 말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야곱 아망(Jakob Ammann)이 창시한 아미쉬는 병역 거부는 물론 연금 수령의 거부와 같이 정부로부터 모든 도움을 거부하고 의료보험도 거부한다. 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검은색 계통의 옷만 입으며, 전통 방식의 농축 산업에 종사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설립한 마을 학교에서만 교육을 받고 종교는 연구대상이 아니라는 믿음에 따라 종교와 과학을 가르치지 않고, 읽기, 쓰기, 계산하는 법 등 생활에 필요한 기본지식만 배운다. 

조지 폭스

재세례파 운동은 퀘이커와 역사적 평화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간접적으로는 침례교, 청교도 운동, 감리교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재세례파와 청교도의 영향을 받은 퀘이커교(Quakers)는 영국의 성공회에 반발한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에 의해 시작되었다. 모든 개인의 마음속에 '내면의 빛'이 있다고 보고 이를 통해 평등, 정의, 평화와 같은 선을 이루고자 한 퀘이커는 과거에 여성참정권 확보와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고 지금도 ‘여호와의 증인’과 함께 양심적 병역거부에 충실하다.

찰스 러셀
찰스 러셀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은 19세기 미국의 재야 성서학자 찰스 테이즈 러셀(Charles Taze Russell, 1852~1916)을 중심으로 결성된 기독교파로 초기 그리스도교를 재확립했다고 주장하면서 정치 활동을 하지 않고 성직 계급과 십일조를 부인하며 전쟁에 반대하고 병역을 거부한다. 한국에서는 이단으로 인정되고 병역 거부로 인해 박해를 받았다. 

뮌처

독일의 뮌처(Thomas Munzer, 1489~1525)는 본래 루터의 제자였으나, 카타리파 교회를 담당하면서 하층민들의 비참한 삶과 고통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루터와 다른 종교개혁적 성향을 띤 츠비카우의 예언자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그들은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사회개혁도 주장했다. 그들의 대표자격인 니콜라우스 스토르히는 ‘8항목’을 통해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위정자와 성직자들에 대해 비판했다.

“만약 모든 사람이 똑같고 평등한 위치라면 또한 모든 것이 공동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고 쥐새끼 같은 왕을 더 이상 섬기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색욕에 가득 차고 나쁜 성직자들과 뚱뚱한 호색가들은 없어져야 한다.”

토마스 뮌처
토마스 뮌처

뮌처는 성경만을 주장하는 루터를 맹목적으로 성경 문자에 의존한다고 비난하고, 교회는 성령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525년부터 농민 반란을 이끌고, 일종의 민중 신정 정치를 구현하려고 했으나 처형당했다. 당시 농민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았다. 

①목사는 회중에 의해 선택돼야 한다. 

②가축의 십일조제도를 폐지하고, 곡물의 십일조는 목사와 다른 공동체를 위해 사용돼야 한다. 

③복음 정신과 기독교인의 자유사상에 배치되는 농노제도는 폐지돼야 한다. 

④농노는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된 자유인들이므로, 더 이상 소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 

⑤귀족들이 약탈해 간 수렵권, 어획권, 벌목권 등을 농민들에게 되돌리도록 법이 개정돼야 한다. 

⑥과도한 세금제도는 폐지돼야 한다. 

⑦농노에게 부과되었던 강제 노역은 폐지돼야 하고 정당하게 보수로 지불돼야 한다. 

⑧과도한 소작료는 폐지돼야 한다. 

⑨귀족들에 의한 새로운 법 제정을 반대하며, 공정한 법의 집행과 성문화된 독일의 법으로 환원돼야 한다. 

⑩영주들이 돈을 지불하지 않고 소유한 모든 공유지는 영주와 농민이 공동으로 소유해야 한다. 

⑪과부와 고아를 불의하게 억압하는 상속세와 사망세는 폐지돼야 한다. 

⑫위의 요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철회돼야 한다.

농민들은 12개 요구사항이 루터의 복음과 일치한다고 보고, 지배계급과 화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이러한 요구사항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루터는 농민들에 대한 영주들의 탐욕을 비판했지만 결국에는 영주들 편에 서고 말았다.

뮌처는 농민혁명 이전부터 루터에게 지배계급인 영주가 아니라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의 편에 서라고 요구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루터를 새로운 ‘비텐베르크의 교황’으로 비판하며 농민들과 함께했다. 그는 종교개혁의 횃불로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도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뮌처를 혁명의 신학자라고 불렀다. 뮌처가 일으킨 농민전쟁은 엥겔스에 의해 처음으로 주목되었지만 엥겔스는 뮌처의 혁명정신을 무시했다. 블로흐는 예수의 가르침은 사랑의 공산주의인데 바울이 내세지향적, 즉 현실개혁과는 무관한 내면성을 지향하는 종교로 바꾸었다고 보았다. 바울은 기독교 전파를 위해 기존 권력과 타협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반면 뮌처는 교회나 수사가 중개하지 않는 예수의 가르침을 세상에 구현하고자 했다. 그의 개혁은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조아키노 다 피오레의 성령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경제적 평등사회에 대한 믿음에 기초했다. 뮌처와 농민들의 저항은 17세기 영국의 디거스와 수평파, 18세기 프랑스 보르도의 오르미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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