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0:05 (금)
본격서평 : 구술사의 한계에 갇힌 역사인류학
본격서평 : 구술사의 한계에 갇힌 역사인류학
  • 강성호 순천대
  • 승인 2003.09.1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류학자의 과거여행'(역사비평사 刊)과 '린 마을 이야기'(이산 刊)

포스트 모던 역사학이 주목받으면서 '증언'을 역사자료로 승격하고자 하는 '구술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이 용기에 따르면 구술사(oral history)란 구술(자료)를 통해 쓰여진 역사이고, 구술은 과거경험에 대한 구술을 말로 풀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구술은 구술자 경험의 개인성과 부분성, 기억의 현재성, 면담의 상황성 등을 고려하면서 다루어야 이해될 수 있는 사료이다. 이러한 구술사는 공식적 기록으로 담아내지 못했던 한국현대사의 이면을 밝히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관련 연구성과들이 1990년대 중반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에 출판된 역사 인류학자 윤택림의 '인류학자의 과거여행'과 문화인류학자 황수민의 '린마을 이야기'도 이러한 구술사를 주요 연구방법론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 중 현대사의 그늘에 대한 비판적 인식

윤택림의 책은 한국 충청도 예산지역에 위치한 '예산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활동이 활발했던 '시양리'라는 마을을 한국전쟁시기와 관련해서 다루었다. 윤택림은 '시양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구술사, 생애사, 가족사를 통해서, 한민족 전체가 한국전쟁을 동일하게 인식했다는 기존 학계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한 민족내의 다양한 주체들이 한국전쟁을 다양하게 경험했고 다양하게 해석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이 책은 시양리 사람들에게 있어 '6.25는 북한 사람들과의 전쟁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간의 전쟁이었다'라는 도전적인 결론을 끌어내었다.

황수민의 책은 중국 동남부 지역에 위치한 푸젠(福建)성의 린 마을(林村)이 1949년 중공성립이후 35년 동안 겪었던 일을 다루면서, 이 마을 당 서기 예원더(葉文德)의 구술에 근거한 생애사를 통해 린 마을의 역사를 재구성하였다. 황수민은 이러한 재구성을 통해 급진적인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린 마을의 사회적 통합을 유지시킨 것은 공산주의 이념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족적 충성, 인간관계, 그리고 공동의 사회적 복지의식'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두 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연구방법론 측면에서 두 책은 한국전쟁시기의 '시양리'라는 좌익마을의 좌우갈등과 중국 사회주의 건설기의 '린 마을'의 내부 대립이라는 비슷한 소재를 인류학에 근거한 구술사라는 방법을 통해 다루고 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두 책은 역사를 다양한 주체의 입장에서 다양하게 해석하려 한다. 또한 현실적 측면과 관련해서도 윤택림은 이데올로기와 계급갈등을 강조하면서 구체적 역사현실과 새로운 역사방법론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한국의 민중사 관점을 비판하고 있고, 황수민은 농촌에서의 사회주의 정책의 시행착오와 실패를 초래한 중국사회주의 정부의 잘못을 부각시켰다.

이 두 책은 우리 현대사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는 한국전쟁과 중국 사회주의 건설과정을 다양하고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또한 실증사학이나 민중사학 등이 다양한 역사자료와 다양한 목소리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고, 그리고 인접 인류학과 학제적 교류를 시작할 수 있게 된 점도 이 두 책이 기여한 긍정적 측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두 책의 시도들이 과연 성공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윤택림은 이 책을 통해  '기존의 역사연구뿐만 아니라 민중사에도 대안적 역사를 제시할 것'이라는 야심 찬 의도를 밝혔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하려면  먼저 이 책에서 구술사를 통해 새롭게 확인된 사실들이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역사문제 연구소의 이신철은 이번 가을에 발간된 {역사비평}에 실린 서평에서 윤택림이 주장하는 사실들이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조목조목 반론을 가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구체적 사실과 관련해서 어느 연구자의 견해가 더 정확한 지를 판단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다만 구술사의 새로운 연구성과가 구체적인 역사서술 검증과 관련하여 기존의 연구성과를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인류학과 역사학의 현실을 읽는 눈

또한 윤택림의 새로운 방법을 통해 확인된 사실들에 근거해서 추론된 결론이 한국전쟁 전체와 관련해서 얼마나 일반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도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황수민의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시양리나 린마을의 사례를 일반화시키는 것은 시양리나 린마을의 사례를 일반화시킬 수 있다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생겨나는 것은 인류학과 역사학의 역사현실에 대한 접근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윤택림에게 있어 역사사실은 '절대적이고 엄연한 정확한 사실'이 아니고 단지 '재구성된 과거에 대한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윤택림은 역사인류학자로서 '어느 것이 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인가를 판단하기보다 각자의 진실이 왜 진실되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다양한 판본(version)'으로 이어지게 된다(윤택림, [역사인류학자의 시각에서 본 역사학-인류학을 중심으로]). 결국 윤택림의 역사인류학이 이러한 기본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역사사실의 객관성을 강조하는 역사학과 다양한 목소리를 강조하는 역사인류학 사이의 기존의 벽은 허물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는 고려대에서 맑스-엥겔스의 역사발전론과 이행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관심분야는 역사이론과 현대 사회사상이다. 저서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등이 있고 역서로는 최근 홉스봄의 '역사론'을 번역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