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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김현경의 책] 문화 앞의 사물
[인류학자 김현경의 책] 문화 앞의 사물
  • 교수신문
  • 승인 2019.11.08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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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배수아 |작가정신 |2003.09.25. |페이지 126

철수는 어느 정도는 우등생이었고 또 그만큼은 모범생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었다. 우리는 완전한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테디한 관계도 아닌 채로 대학을 마쳤다. 특별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잠들기 전에 전화하고 주말은 반드시 같이 보내고 새로 들어온 영화를 같이 보고 생일을 기억하고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졸업할 즈음해서는 서로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간다. 그리고 술을 마시거나 포르노 테이프를 볼 때면 생각이 나고 서서히 모든 세상의 기준을 상대편을 통해서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철수와 나는 특별하지 않았다. 철수는 나에게 나는 철수에게 감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철수의 친구들과 내 친구들은 우리가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배수아의 <철수>에 대해 글을 쓴다면(지금 쓰고 있는 것보다 더 긴, 제대로 된 글을 쓴다면), 거기에 <문화 앞의 사물>이라는 제목을 붙여주려고 한다. 나는 이 표현을 베르너 풀트가 쓴 발터 벤야민의 전기에서 읽었다. 그에 따르면 스물세 살의 벤야민이 어느 날 친구에게 쓴 편지에 이 구절이 나온다고 한다. 친구는 홍등가에 드나드는 습관이 있었는데 자기는 몸을 파는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인간적인 것’을 발견한다고 벤야민에게 말했다. 그러자 벤야민은 친구의 ‘휴머니즘’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창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문화 앞에서 사물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철수>의 화자는 철수가 군대에 가기 직전 그의 방에 들렀다가 우발적으로 성행위를 한다. 서로에 대해 아무런 감동도 하지 않은 채. 그러니까 이 성행위는 화자에게 질문처럼 나타난다. ‘이러한 행위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지만 철수에게 성행위의 의미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는 성행위를 했으므로 거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환경의 차이’나 부모의 예상되는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에게 ‘연인’의 지위를 할당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그녀에게 자기가 군대에 가면 훈련소에 면회를 와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그녀는 철수의 관점을 거부한다. 그녀는 철수의 부탁대로 면회를 가지만, 그것이 연인으로서의 지위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러한 거부는 철수의 어머니가 싸준 닭을 먹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철수의 어머니가 화자에게 맡긴 닭고기는 철수와 그녀의 관계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닭고기를 철수에게 전달하는 일(그리고 나누어 먹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착오에 의해서 그녀는 눈 내리는 산 속의 훈련장을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김철수라는 사람이 있지만 방금 사고를 당해서 만날 수 없다고, 그런데 부대에 김철수가 한 명 더 있고, 당신이 찾는 사람은 아마 그 사람일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결국 그녀는 어두워질 무렵에야 철수를 만나게 된다. 철수는 그녀를 안으려 하고 닭고기를 억지로 먹이려 한다. 그러나 그녀는 닭고기를 종이봉투에 담아 변소에 버린다.  

“너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벽을 쌓고 있기만 한다. 나는 아무렇게나 기분대로 이 세상을 사는 인종들이 언제나 싫었어. 나, 너에게 의무감을 가지려고 했다.”
나는 철수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너의 변소가 너의 닭을 먹었으니 이제 너는 의무를 다했어.”

철수가 그녀에게 면회를 와달라고 했을 때, 그 제안에 내포된 메시지는 "나는 너를 ‘변소’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철수가 준 닭을 변소에 버리면서, 그런 종류의 의무감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남자에게 한 번 몸을 내주고 버려지느냐 (그래서 그에게 ‘변소’가 되느냐) 아니면 그의 선택을 받아서 연인의 지위를 얻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두 경우 모두 화자는 ‘문화 앞의 사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군대라는, 살인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에 와 있으면서도 문화에 의해 주어진 의미들을 하나도 의심하지 않는 철수 앞에서, 그를 만나러 오는 길에 그녀가 환각처럼 보았던, 눈이 내리는 낚시터와 영양실조에 걸린 군인들을 생각한다. 그 속에도 철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철수는 “까마귀처럼 흰 벼랑에서 떨어져버렸기” 때문이다. 부대에 있는 건강한 철수가 아니라, 고립되고 낙오되어 잊혀진 철수. 

육체와 영혼의 분리와도 같은 이 분리는,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후, 화자가 자기가 살았던 16번지의, 지금은 폐가가 된 집에서, 어떤 남자와 성행위를 가질 때 다시 반복된다. 자신의 육체에 대한 철저한 학대라고 해도 좋을 이 관계 속에서 그녀는 또 다른 자기가, “조용하게 비를 맞으면서 무너져가는 빈집의 창가를 무생물의 풍경처럼 지나가는 것을” 본다. 

이제 어디에도 없을 나, 재가 되어 사라지고 어둠이 되어 부패할 나, 그런 내가 내 인생을 온통 방치하고 유기한 채 이 추락의 마지막에서 누추한 손을 내민다. 사실은, 나는 내가 아니었다. 짐승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 가난과 모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갔던 나는 잠시 악령에 유혹되어 나를 떠나온 허공이었을 뿐이다. 멀리 있는 나는 귀하고 아름답다. 그리하여 내 몸은 타락하고 또 타락해도 백 년에 한 번 꽃 피는 사막의 난초처럼 또 다른 나는 생에 대한 불감不感으로 너에게 다가간다. 

구토를 일으키는 현실과 그것을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수많은 말들 앞에서 그녀는 차라리 생에 대한 불감을 원한다. 그녀는 그렇게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 시간을 살아남으려> 한다.

인류학자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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