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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를 거르는 가장 강력한 필터는 시민의 머리”
“가짜뉴스를 거르는 가장 강력한 필터는 시민의 머리”
  • 김범진
  • 승인 2019.10.25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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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는 의도하지 않게 실수로 만들어진 ‘잘못된 정보’와
고의적으로 조작해 만든 ‘허위정보’를 개념적으로 구분
‘사실성’ 여부만으로는 가짜뉴스라고 규정짓기에 충분치 않고, ‘의도성’ 여부가 중요
디지털 사회의 새로운 시민성과 시민사회 역량 위해 미디어 교육 필요

뉴스를 보는 눈 | 저자 구본권 | 풀빛 | 2019.10.25 | 페이지 328 |

“지금 우주선을 타고 온 화성인들이 괴상한 무기를 이용해 미군을 격퇴하며 지구를 침공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 동부 뉴저지주의 크로버시는 화성인들의 공격을 받아 완전히 점령당했습니다. 화성인들은 계속 진격해 뉴욕으로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전 군대에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미국 CBS에서 1938년 10월 30일 저녁에 방송한 라디오 드라마의 한 대목이다. 이 내용이 방송되자 수많은 라디오 청취자들이 진짜 화성인이 침략했다고 착각해 피난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피난길에 올랐다가 다친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당시 상황이 신문기사로 보도된 것은 물론, 사람들은 피해 보상을 요구했고 CBS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공개적으로 사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모든 청취자가 화성인의 지구 침공을 실제 상황이라 믿은 것은 아니었다. 왜 누구는 실감나는 드라마로 즐겼는데, 누구는 실제상황으로 착각했을까? 저자인 구본권 기자는 이를 두고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며, 미디어의 영향력이 큰 만큼 그것을 이용하는 사용자의 비판적 이해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한겨레에서 30여 년 동안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여러 해 대학 강의를 해온 언론학 박사인 구 기자는 이 책을 통해 ‘미디어 리터러시’의 필요성을 언론의 본질과 시민의 자질이라는 측면에서 정리했다. 알랭 드 보통이 <뉴스의 시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현대 사회는 교육에 대해 온갖 말을 하면서도 구성원들을 가르치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수단인 뉴스를 검토하는 데 참으로 무심하다. 지금 성인들은 학교에서 시험과 졸업을 위한 공부는 했지만, 미디어가 어떻게 우리 생각을 움직이고 사회의 통념을 만드는지는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다.

한겨레 기자로 줄곧 일해오며 자신 또한 일정한 관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고백한 구 기자는 “근거에 기반한 상호 토론과 사회적 감시를 통해 더 나은 진실성을 향해 나아갈 때 건강한 언론이 될 수 있다”고 밝힌다. 올바른 언론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시민이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짜뉴스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이와 관련 미국 콜롬비아저널리즘리뷰는 지난 2017년 ‘사람들은 가짜뉴스를 질 낮은 언론, 그리고 정치적 선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분석한 기사를 냈다. 최근 ‘조국 사태’와 관련 조 전 장관에 제기된 각종 의혹 보도들을 일각에서 ‘가짜뉴스’로 규정짓는 일도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사실성’ 여부만을 기준으로 삼고, 사실로 믿을 만한 거짓정보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가짜뉴스란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의도하지 않게 실수로 만들어진 ‘잘못된 정보’(misinformation)와, 고의적으로 조작해 만든 ‘허위정보’(disinformation)를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저자도 ‘사실성’ 여부만으로는 가짜뉴스라고 규정짓기에 충분치 않고, ‘의도성’ 여부가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즉 오보와 가짜뉴스는 둘 다 거짓 정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오보에 의도성이 추가된 ‘고의적 오보’일 때 가짜뉴스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몇몇 거대언론에서 의도적으로 자행해온 왜곡보도는 가짜뉴스라고 규정할 수 있다. 또한 “건국 이래 우리는 수많은 왜곡보도와 함께 살아왔다”(정철운 미디어오늘 기자)는 진단처럼, 가짜뉴스라는 표현이 생기기 오래전부터 한국은 이미 가짜뉴스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많은 수의 신문 지면을 그대로 실어 왜곡 보도의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고, 이를 식별할 수 있는 노하우를 10가지로 나누어 가면서까지 자세히 설명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뉴스 이용자의 비판적 콘텐츠 수용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소셜미디어의 정보 유통 속성과 고도화된 인공지능 기술이 결합하면서 가짜뉴스가 훨씬 더 정교해졌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미디어 활용능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육 과정 안팎에서 미디어 교육을 제도화했는데, 최근 가짜뉴스가 문제 되자 작년 미디어 교육을 강화하겠다며 이를 위한 예산을 2배 늘리기로 했다. 이러한 프랑스 미디어 교육의 주된 목표가 ‘민주시민으로서의 민주주의 기초 소양을 기르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는 프랑스의 사례처럼 디지털 미디어 활용 교육을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시민을 교육 대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도 함께 지적한다. 시민이 주체가 돼 스스로 활용능력을 학습하고 목표를 설정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또한 미디어 교육을 단지 개인의 미디어 활용능력 배양과 학습으로 접근하기보다, 더욱 나아가 디지털 사회의 새로운 시민성과 시민사회 역량을 키우는 데 쓰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좋다고 제언한다. 김범진 기자 ji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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