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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문화 칼럼] 한 세기를 건너온 예술
[김희철의 문화 칼럼] 한 세기를 건너온 예술
  • 교수신문
  • 승인 2019.10.2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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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기념전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1부를 보고 와서

화가가 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고 미대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길을 택했다. 그래도 다큐멘터리 역시 카메라를 통해 시대를 그리는 화가라고 생각한다. 2017년에 발표한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이중섭의 눈>을 연출하면서 예술가의 삶, 특히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도 예술혼을 잃지 않고 살았던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중섭, 남인수, 구상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림으로, 음악으로, 문학으로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들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했다.

근대기에 널리 쓰인 활판인쇄기 ⓒ김희철
근대기에 널리 쓰인 활판인쇄기 ⓒ김희철

 이중섭은 1916년 태어났다. 그래서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6년에 이중섭 특별전이 열렸고 동갑내기 변월룡, 이쾌대의 전시도 있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이중섭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 제주, 통영, 대구, 서울 등을 떠돌며 피난 생활을 하다가 전쟁이 끝나고 3년이 지난 56년에 서울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 신분으로 사망했다. 연해주 출신인 변월룡은 러시아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담은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북한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중섭과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유학했던 이쾌대는 해방의 기쁨을 잠시 느끼다가 인민군으로 참전, 부산포로 수용소에서 휴전을 맞고는 월북을 선택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격동기는 이 세 사람의 삶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개관 50주년을 맞아 기념전을 준비했는데 그 1부는 1900년부터 1950년까지의 예술이다. 덕수궁관의 1층 좌우, 2층 좌우를 관람객의 동선 순서대로 구성한 전시의 제목은 ‘의로운 이들의 기록’, ‘예술과 계몽’, ‘민중의 소리’, ‘조선의 마음’이다.

덕수궁 시립미술관 전경 ⓒ김희철
덕수궁 시립미술관 전경 ⓒ김희철

 제1전시실 ‘조선의 마음’에서는 쇄국과 개화가 충돌하는 격변기를 살았던 최익현 등 우국지사들의 초상화, 독립운동가들이 그렸던 사군자 등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의병 활동, 독립운동에 가문의 엄청난 재산을 쏟아붓고 말년을 궁핍하게 살다가 죽었다. 이 시기를 지나 개화파들의 활동에 주목한 제2전시실에서는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위기에 처한 국가를 문명화하고 국민들을 계몽하겠다는 의지를 볼 수 있는 물건들이 많았다.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가 발간되고 인쇄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각종 잡지, 시집, 소설책들이 만들어진 시기가 이때다. 천도교 지도자이면서 서예가 오세창,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등 많은 문화운동가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하는 등 3·1운동의 주도 세력이 되기도 했다. 고희동의 1915년 작 <부채를 든 자화상>은 벌써 한 세기를 건너 관객의 눈과 만나고 있었다.

 전시장의 벽 몇 군데엔 당시 예술가들이 남긴 글들이 타이포그래피로 소개되고 있었다. 동양화가이면서 평론가로 왕성한 활동을 했던 김용준이 1948년 근원수필에 쓴 <예술에 대한 소감>이라는 글을 하나 소개한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결국 완성된 인격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되기 전에 예술이 나올 수는 없다. 미는 곧 선이다. 미는 기술의 연마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인격의 행위화에서 완전한 미는 성립된다. 기술을 부육이라면 인격은 근골이다. 든든한 근골과 유연한 부육이 서로 합일될 때 비로소 미의 영혼은 서식할 수 있다.”

 단순히 인간의 기교적 표현으로 구성된 예술이 아니라 진실된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예술을 진정한 것으로 인정했던 당시 예술가들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 제3전시실의 ‘민중의 소리’로 들어갔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관련된 예술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나키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에 영향을 받은 판화, 인쇄 미술은 그때까지의 기존 예술들에서 파격적으로 변신했다. 판화처럼 복제 가능한 예술인 영화가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전시실 가운데에는 유관순이 일제에 저항하는 이야기를 극영화로 만든 흑백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화면의 초점이 흐리고 연극적 요소가 강하긴 했지만 카메라 워킹이나 영상 문법이 현대영상물의 법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 제4전시실 ‘조선의 마음’에서는 역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림들이 많았다. 이중섭의 소묘 작업, 추상화가 김환기의 세련된 작품들, 이쾌대의 웅장하고 박력 있는 대작들이 관람객의 시선을 붙들어 맸다. 그들은 모두 서양의 미술을 배웠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 전통의 미학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치열하게 고민했던 예술가들이었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예술가는 죽어도 작품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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