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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대담] 질주하는 세계-세계화와 국민국가의 動學과 미래
[기획대담] 질주하는 세계-세계화와 국민국가의 動學과 미래
  • 권혁범, 김호기 교수
  • 승인 2001.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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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연세대 교수 - 권혁범 대전대 교수
다섯 번째 기획대담의 주제는 ‘질주하는 세계-세계화와 국민국가의 동학과 미래’다. ‘질주하는 세계’라는 기든스의 표현이 묘사하듯 현대사회는 변화의 급진성, 통제불가능성, 불확실성의 증대로 특징지어지는 ‘소용돌이 세계’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지난 수세기 동안 인간들의 삶을 둘러싸고 존재했던 제도환경 역시 심각한 변화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변화의 핵심적인 동인은 역시 세계화다. 이번 대담에서는 세계화의 의미와 그것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변화를 ‘국민국가’ ‘민족주의’ ‘전통과 현대’라는 중층적인 문제틀 속에서 조명해 보았다.

●일시 : 2월 24일 오전 11시
●장소 : 교수신문사 회의실
●진행·정리 : 이세영 기자

대담을 연재한 이래 가장 열띤 논전이 2시간 30분 동안 이어졌다. 부드럽고 정제된 발언들이 오갔으나 말 속에 감추어진 비판의 날은 매우 ‘예각적’이었다. 지면관계상 대담에서 나온 모든 논의를 소개하지 못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세계화, 덫인가 기회인가

권혁범(이하 ‘권’) : 97년 경제위기 직후부터 세계화의 위험성에 대해 적잖은 논의가 있어왔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세계화가 지역공동체와 생태계를 파괴할 뿐 아니라 모든 사회운영원리를 이윤의 극대화라는 생산성 논리로 일원화한다는 것이었죠. 이 같은 지적엔 대체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세계화가 과연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만으로 규정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세계화가 국민국가와 민족주의의 폐쇄적 틀에 갇혀있던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인식과 경험의 지평을 열어준 것도 사실이니까요.

김호기(이하 ‘김’) : 선생님께서 지적했듯이 ‘덫인가 기회인가’라는 이분법적 접근은 곤란합니다. 지난 경험에 비추어볼 때, 세계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가 경제의 세계화라면 다른 하나는 문화의 세계화입니다. 경제의 세계화는 명백히 ‘덫’으로서의 성격을 지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문화의 세계화지요. 그것은 선진국 문화산업의 세계화이자 동시에 서구 근대문화의 세계화입니다. 서구 근대문화는 헐리우드나 디즈니 문화의 세계화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적 종속이라는 부정적 결과도 가져왔지만 민주주의, 평등주의, 자유주의 같은 보편적인 가치의 확산을 가져다 준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의 세계화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이분법을 초월합니다.

권 : 자본의 세계화 역시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한국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은 대단히 후진적입니다. 세계화가 한국자본으로 하여금 합리적 경영기법과 민주적인 지배구조의 도입을 미룰 수 없게 만드는 측면도 있습니다. 문화의 세계화 역시 마찬가집니다. 외국대중문화가 수입됨으로써 문화적 종속과 정체성의 혼란이 초래될 수 있지만, 어차피 정체성이란 유동적이고 역사적인 것입니다. 혼란과 혼합을 통해 국민국가의 속박을 넘어서는 다양하고 창조적인 삶의 방식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기는 법입니다.

김 : 저는 좀 다르게 봅니다. 자본의 세계화는 독자적인 중요성을 지닙니다. 70년대 중반 이후 가속화된 자본의 세계화는 초국적기업의 팽창, 금융자본의 세계화와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초국적기업의 세계화에는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측면이 두드러지지요. 예컨대 90년대 초반 세계인구의 15%를 차지하는 OECD국가들의 소득은 세계 총소득의 78%를 차지했습니다. 반면, 세계인구의 56%를 차지하는 저소득국가들의 소득은 총소득의 5%에 불과합니다. 소수의 잘사는 국가가 세계경제를 좌우하고 있는 셈이죠. 정보혁명과 함께 빠른 속도로 확산된 금융자본의 세계화 역시 심각한 문젭니다. 투기성 금융자본을 통제할 초국적 케인즈주의가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능력을 갖고 있는 소수 OECD국가들은 수수방관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권 : 투기성 금융자본에 대한 전지구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이야기될 때, 논의의 틀을 外因論으로 끌고 가버린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이 같은 논리는 우리 내부의 후진성과 전근대성에 대한 성찰을 가로막습니다. 어느 재벌기업 회장이 그랬다지요? 시민단체의 재벌개혁론은 외국자본을 도와주는 논리라고.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민족주의 좌파라고 별반 다를 것도 없습니다. 경제위기 국면에 나온 한총련 성명서의 논리는 금모으기 운동 수준의 민족담론과 하등 차이가 없더군요.

국민국가는 몰락하는가

김 : 세계화가 국민국가를 몰락시킬 것이라 단언하는 것은 성급합니다. 다만 장기적으로 몰락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근대국민국가 역시 생성 발전 소멸이란 생애주기를 갖는 역사적 발명품이니까요. 하지만 중기적으로 볼 때 국민국가는 중요한 위상을 보유할 것입니다. 경제와 문화의 영역은 빠른 속도로 세계화되고 있지만, 정치 영역의 세계화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죠. 정치에서 중요한 것이 외교와 국방인데, 이런 정치적 주권은 쉽게 양도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 : 규범적 차원과 현실적 차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국민국가는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세계화의 부정적 결과들이 가시화됨에 따라 국민국가가 아니면 무엇이 사회구성원들의 삶의 질과 생존권을 보호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있는데, 이건 사실 딜레마예요. 저 역시 세계화의 파괴적 결과들에 대처해나가기 위해 과도기적으로 국민국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규범적인 차원에서 볼 때, 국가는 최소화돼야죠. 지금까지 국민국가가 맡았던 역할을 시민사회나 지역수준의 정치공동체에서 담당해나가야 합니다. 한마디로 국민국가와 세계화의 딜레마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은 ‘분권화’입니다.

김 : 분권화는 물론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것인가’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경제적 분배의 문제지요. 제가 볼 때 이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최후의 거점은 국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권화도 좋고 시민사회의 역할도 중요합니다만, 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의 집중이나 관료제의 심화를 극복할 수 있는 근대국가의 민주적 재편이지요. 저는 이 문제가 사회민주주의자와 생태주의자를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봅니다. 제 의견을 서둘러 말한다면 저는 사회민주주의 프로젝트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권 :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자칫 국가의 힘과 개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이죠. 그것은 개인의 온전한 해방에 치명적인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럽의 복지국가들이 보여준 성취와 함께 그것의 문제점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안목입니다.

김 : 개인의 해방을 말씀하셨는데, 이때의 개인 역시 진공 속의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입니다.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국가나 사회제도의 도움 없이 해방에 이를 수 있습니까? 물론 개인해방이라는 선생님의 궁극적 이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개인의 해방이라도 그 개인이 놓여있는 정치적·경제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문제는 국가를 억압의 체계와 동일시한다는 데 놓여있는 것 같군요.

권 : 저는 국가가 본질적으로 억압적이라고 봅니다. 개인 해방의 사회적 조건을 고려해야한다는 지적은 옳지만, 그것을 국가개입을 통해 해결하려 할 경우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김 : 하지만 근대국가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관료제나 권력의 집중이란 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류가 이전에 성취하지 못했던 대의민주주의의 구현체니까요. 이론적 수준에서 본다면 자유해방주의자들의 주장이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지평에서 그것의 한계는 작지 않습니다.

권 : 글쎄요. 한국에선 오히려 과도한 국가의존이 문제 아닐까요? 좌우를 막론하고 국가가 개인적 삶의 확장을 위해 거리를 두어야할 외부적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성찰이 부족한 셈이지요.

김 : 선생님과 저의 입장차이를 잘 보여주는 이슈가 민족주의입니다. 저는 최근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 시도되고 있는 민족주의 비판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것이 갖고 있는 ‘반대막대 구부리기’로의 의미를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중요한 건 민족주의 일반이 아니라 ‘어떤 민족주의냐’ 입니다. 어느 나라의 민족주의든 그 안에는 공동체적 요소와 시민적 요소가 공존하기 마련입니다.

권 :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의 위험성은 그것이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작동하는 가장 중심적인 코드라는 점에서 발생합니다. 민족을 최상의 가치로 놓을 경우 민족적 정체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소수자 집단, 이를테면 여성이나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집단은 타자화되고 억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제3세계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가진 진보적 측면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민족주의의 억압성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아온 것은 바로 ‘우리는 당한 사람들’이라는 피해자 의식이었음을 간과해선 안되지요. 미군에 의한 환경파괴 문제를 제기하고 폭격장 폐쇄운동을 벌이는 것은 정당합니다. 하지만 ‘미국놈들 물러가라’는 식의 민족주의적 주권논리는 의도와는 무관하게 우리사회 내부의 문제를 은폐할 수 있습니다. 미군 폭격장 폐쇄를 요구하면서 왜 한국군 폭격장 문제는 제기하지 않습니까? 미군에 결코 뒤지지 않는 한국군의 환경파괴는 도대체 왜 이야기하지 않는 겁니까?

세계화 시대의 민족주의

김 : 귀담아 들을만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본의 세계화에는 서구와 비서구 사이의 ‘힘의 비대칭관계’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불평등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이념적 기제로 민족주의는 아직까지 유효성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비서구사회의 열린 민족주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민족주의를 반드시 일국적인 차원에 국한시켜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약소국간의 지역적 연대를 가능케 하는 동력 가운데 하나도 그들이 저항적 민족주의의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아닐까요?

권 : 저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제3세계의 연대는 민족주의를 넘어선 국제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역사적 교훈 아닙니까? 우리사회에는 시민운동가들조차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다는 게 문제입니다. 폐쇄적인 ‘우리중심주의’에 갇혀있기 때문이죠. 더욱 우려되는 점은 신세대들조차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중심가치로 내면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김 : 그렇게 극단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계기는 다중적입니다. 개인 안에는 보편적 자아와 민족적 자아, 그리고 지역적 자아라는 다중적 정체성의 계기가 공존합니다. 과연 젊은 세대들에게 민족적 자아가 가장 두드러진 정체성의 원천이라고 보십니까? 제가 볼 때 그렇지 않아요. 그들에게 민족적 자아는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 옳지요. 제가 우려하는 것은 일각에서 민족주의를 또 다른 타자, 일방적으로 ‘해체시켜야할 무엇’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지요. 분단체제 극복문제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보편적 가치만 강조한다고 해결책이 제시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권 : 과장 아닌가요? 과연 우리사회에서 민족주의가 타자화되고 있습니까? 어디를 가건,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신세대에 대한 선생님의 관찰도 표피적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군요. ‘금모으기 운동’에서 보여준 청소년들의 모습이나 경제위기 직후 학생운동 주류의 대응방식을 보십시오. 평상시엔 잠복해있다가도 결정적 계기나 자극이 주어지면 그들 안에 자리잡고 있는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성향은 여지없이 표출됩니다. 다음으로 분단체제 극복문제를 제기하셨는데…제가 볼 때 ‘민족동질성론’에 기반한 지금의 통일논의는 개인의 다양성과 다중적 정체성의 문제를 억압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질성이란 결국 분단이전 시기의 기억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을 텐데, 그게 대체 뭡니까? 전통적 공동체성과 가부장제, 이런 것들 아닙니까?

김 : 어떻게 한민족의 정체성을 가부장주의, 여성억압, 공동체주의 등으로만 규정할 수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 선생님의 논리에는 명백한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군요. 하지만 전통과 근대라는 문제설정에는 제국주의-반제국주의, 서구-비서구, 문명-야만 등 복잡한 담론의 회로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권 : 제 말은 특정한 체계가 서구에서 먼저 형성됐다고 해서, 그것을 서구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사회에서 인류사가 성취한 선진적 가치체계의 도입이 늦어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것이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 논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넘어서

김 : 제가 서구에서 만들어진 모든 담론을 문제삼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담론이란 권력의 비대칭적인 관계와 무관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서구사회를 바라보는 서구의 눈, 비서구사회에 대한 서구의 담론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비서구 사회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식-권력의 담론입니다. 문제는 선생님이 옹호하는 보편적 가치로서의 서구 담론과 오리엔탈리즘이 과연 별개의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비서구사회의 지식인들이 직면하는 핵심적 딜레마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체적 현실 속에서 보편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은 항상 밀접하게 연계되어 작동하니까요.

권 : 보편적 요소와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는 구분될 수 있고 구분돼야 합니다. 그것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선진적인 제도나 가치체계를 도입하자는 주장을 ‘순진한 근대화 논리’나 ‘제국주의의 음모’라고 배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적인 사례가 중국과 북한의 인권문제입니다. 미국이 자국 이익의 확대를 위해 이들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에서 통용되는 사회주의적 인권의 특수성을 존중해야한다는 논리는 더욱 위험합니다. 서구-비서구, 제국주의-제3세계의 이분법은 오히려 보편적 인권과 평화, 환경의 문제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제가 여성주의적 입장을 제기할 때마다 부딪치는 비판이 ‘그것은 서구의 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주의적 가치가 보편화되지 않는 것도 민족주의적 담론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김 : 민족주의란 개념을 대단히 신축적으로 사용하고 계시군요. 선생님께서는 민족주의를 가부장주의와 동일시하는가 하면 때로는 부국강병주의와 동일시합니다. 하지만 민족주의와 가부장주의는 별개의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성차별이 과연 민족주의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어온 유교적 가부장주의가 보다 중요한 요인이죠. 생태문제 역시 마찬가집니다. 생태위기는 부국강병주의로서의 민족주의보다는 시장적 규범이 부재한 천민적 자본주의의 소산입니다. 민족주의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추상적 개념이나 가치체계로 간주돼서는 곤란하지요. 그것은 정치적 권위주의나 천민적 자본주의와 동일한 수준에 놓여있는 또 하나의 정치적·문화적 층위일 뿐입니다. 선생님의 논리는 일종의 민족주의 환원론으로 들립니다.

권 : 유교의 가부장주의나 천민적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요인들에 대해 명백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그렇지 않아요. 그것의 위험성이 덜 알려졌기 때문이지요. 전통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전통의 발명’은 민족주의와 필연적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전통이라 불리는 것들은 근대 이후 민족주의의 확산과정과 맞물려 선택되고 재해석된 전통들입니다. 거기에는 가부장제가 강하게 깔려있습니다. 생태파괴문제도 그렇습니다.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국민국가의 발전논리입니다. 지난 1∼2백년 동안의 산업화는 이 같은 민족주의적 발전논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환경적 재앙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따라서 저는 국민국가나 민족주의를 강화해야한다는 논리가 본질적으로 반생태적이라고 봅니다.

김 : 오늘 토론 흥미로웠습니다. 세계화가 어떤 변화를 초래할는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권 : 생태주의와 민주주의의 긴장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해 아쉽군요. 자리가 마련된다면 언제든 다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

● 김호기가 말하는 권혁범

비판도 필요하나 중요한 것은 해방을 위한 대안

권혁범 교수를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지만 글을 통해 그의 이름은 익히 접해 왔다. 지난 몇 년 동안 그가 발표한 논문들과 저작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바는, 권교수가 우리사회에서 비교적 드문 편에 속하는 ‘개인지향 에콜로지스트’라는 점이다. 개인지향 에콜로지는 말 그대로 개인주의와 생태주의의 적극적인 결합을 목표로 한다. 개인주의가 현대성의 정신적·사상적 뿌리라 할 수 있다면, 생태주의는 현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촉구한다. 이 점에서 권교수는 현대성의 합리적 핵심은 지향하되, 그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려는 사려깊은 정치학자다. 우리의 집단주의적이고 발전지상주의적이었던 지난 50여년의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권교수의 문제제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이며, 또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비판과 해방의 거리, 즉 개인지향 에콜로지가 기왕의 민족주의와 발전주의를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지만 과연 어느 정도까지 사회제도를 재조직할 수 있는 대안적인 모델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다. 권혁범 교수가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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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혁범이 말하는 김호기

논리적 완결성 뛰어나지만 도식주의 경계해야

글에서 느껴지는 인상과 실제 모습이 다른 사람이 많지만, 김호기 교수의 경우 거의 같았다. 그는 부지런하며 주요 사회과학 이론을 두루 섭렵하는 성실성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 시민사회, 국가와 환경에 관한 그의 시각은 균형이 잡혀있고 신중하며 논리적이다. 한국사회의 현안에 대해 심사숙고해서 정리된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현안의 해결을 위한 치열한 모색과 진실에 대한 천착은, 학문적 균형 감각 속에서 때로는 상실될 위험이 있다.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그의 입장은 논리적 완결성을 가지면서도 때로는 도식성의 함정에 빠진다. 국민국가나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사회민주주의적 관점은 내가 보기에 국가의 역할에 대한 지나친 낙관에 기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선진적 민주주의 복지체제가 갖는 반생태성 및 억압성에 대한 근본적 비판정신의 부족으로 읽혀질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 민족주의의 과도기적·제한적 유효성을 나는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김교수의 문제는 보편 가치의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과도한 우려 때문에 보편적 세계주의 안에 민족주의적 이념을 녹여야 할 시대적 요구의 문 밖에서 계속 망설이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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