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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영화를 분석해보니… 충무로도 헐리우드도 ‘성평등’과 거리감
과학이 영화를 분석해보니… 충무로도 헐리우드도 ‘성평등’과 거리감
  • 허정윤
  • 승인 2019.10.17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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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이병주 교수 연구팀, 영화 속 성별 묘사 편향성 분석

여성은 공포·슬픔 ‘수동적’…남성은 분노·싫음 능동적
남자배우가 여자배우보다 클로즈업 샷 장면 더 많아

지난 2년 동안 한국에서 상영된 영화 속 여성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알 수 있는 유의미한 지표가 나왔다. 한국과학기술원(이하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이병주 교수, 장지윤, 이상윤 석사과정 연구팀은 컴퓨터 비전 기술을 통해 상업 영화에서 남성과 여성 성별 간 인물 묘사의 편향성을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해당 연구를 한 배경에는 최근 영화가 다루는 소재와 연출 방식이 사람들의 성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고, 필요하다는 데에서 시작됐다. 할리우드 역시 영화의 묘사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 적극적으로 제작에 반영하는 추세다.

기존에도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를 통해서 여성 인물의 성별 묘사 편향성을 알아볼 수 있었다. 벡델 테스트는 미국의 여성 만화가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고안한 개념으로 균형적인 성별 묘사를 위한 최소한의 요소가 영화에 반영돼 있는지를 판단하는 지표다. 벡델 테스트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 인물이 두 명 이상 등장하며 ▲그 여성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여성 인물들의 대화 주제가 남성 인물과 관련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갖춰야 한다.

사실상 벡델 테스트를 넘기기도 쉽지 않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18 한국영화 산업 결산’에 따르면 지난해 개봉한 순제작비 30억 원 이상의 실사 한국영화 39편 중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10편(25.6%)에 불과했다.

카이스트 연구팀은 벡델 테스트가 주지하지 못한 점을 연구했다. 벡델 테스트는 인물의 대사만으로 판별해 인물의 시각적인 묘사를 고려할 수 없고, 여성 인물 혼자 극을 이끄는 영화에는 적용하기 쉽지 않다. 가령 영화 ‘그래비티’(Gravity, 2013)는 여자 주인공인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의 ‘독무대’와 같지만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또한, 여성 인물만을 평가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성 인물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를 알 수 없으며, 성별 묘사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충분히 대변하기 어렵다. 평가자가 영화를 보고 주관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오류 발생 가능성도 있다.

연구팀은 2017·2018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와 한국 영화 40편을 대상으로 이미지 분석 시스템을 통해 여덟 가지 새로운 지표들을 제시하고 분석해 상업 영화 내에서의 성별 묘사의 편향성을 밝혀냈다. 먼저 극장가에서 두 해 동안 흥행한 한국 영화 20편, 할리우드 영화 20편을 골랐고, 그중 반은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로 선정했다.

이병주 교수 연구팀은 영화의 시간적, 시각적 특성을 반영해 성별 묘사 편향성을 측정하기 위해 이미지 분석 시스템을 도입했다. 효과적 분석을 위해 24프레임 영화를 3프레임으로 다운 샘플링한 뒤,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의 얼굴 감지 기술(Face API)로 영화 인물의 젠더, 감정, 나이, 크기, 위치 등을 확인했다. 그리고 사물 감지 기술(YOLO 9000)로 영화 인물과 함께 등장한 사물의 종류와 위치를 확인했다.

연구팀은 이미지 분석 시스템을 통해 여덟 가지 새로운 지표들을 제시하고 분석해 상업 영화 내에서의 성별 묘사의 편향성을 밝혀냈다. 여기서 여덟 가지 지표란 과거 다양한 매체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성별 묘사 편향성에 관한 연구 결과에 기반해 영화 내 편향성을 판별할 수 있는 정량적 지표다. 연구팀은 ▲감정적 다양성(Emotional Diversity) ▲공간적 역동성(Spatial Staticity) ▲공간적 점유도(Spatial Occupancy) ▲시간적 점유도(Temporal Occupancy) ▲평균 연령(Mean Age) ▲지적 이미지(Intellectual Image) ▲외양 강조도(Emphasis on Appearance) ▲주변 물체의 빈도와 종류(Type and Frequency of Surrounding Objects) 등의 세부항목을 제시했다.

이병주 교수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연구팀은 벡델 테스트 통과 여부를 막론하고 여덟 가지 지표를 통해 영화 대부분이 여성을 편향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정량적으로 밝혀냈다.

‘감정적 다양성’ 지표 부분에서는 여성 인물이 더 획일화된 감정표현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여성 인물은 슬픔, 공포, 놀람 등의 수동적인 감정을, 남성 인물은 분노, 싫음 등의 능동적인 감정을 더 연기했다.

‘주변 물체의 빈도와 종류’ 지표는 영화에서 인물과 함께 화면에 나온 물체의 종류 및 빈도를 분석해 편향성을 측정하는 부분이다. 실제 사례를 보면 여성 인물이 자동차와 함께 나오는 비율은 남성 인물 대비 55.7%였고, 가구와 함께 나오는 비율은 123.9%를 확연히 차이가 났다.

‘여성 캐릭터의 시간적 점유도’는 남성 캐릭터 대비 56% 정도로 낮았으며, 평균 연령은 79.1% 정도로 어렸다. 특히 앞서 언급한 두 지표는 한국 영화에서 두드러졌다.

‘공간 점유도’에서는 중요한 인물이 풀프레임 형식으로 화면에 얼굴이 더 많이 잡힌다는 기준을 가지고 연구했는데, 남성 인물이 여성 인물보다 클로우즈 업 샷이 많았다고 밝혀졌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에선 1인당 연간 평균 영화관람 횟수가 4.25회에 이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영화를 즐겨보는데, 이는 영화라는 매체가 대중의 잠재의식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뜻한다”라며 “따라서 영화 내 묘사가 관객들의 생각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가 보다 활발하게 진행돼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영화는 더욱 신중하게 제작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 교수는 “과학을 근거로 창작활동을 제한하려고 한다”는 비판에는 “사회가 성평등을 추구하는 방향성을 설정한 것은 바꿀 수 없는 흐름”이라며 “학술적인 면에서 기여를 하고 싶었을 뿐 창작을 제한하고 잘잘못을 따질 의도는 없다”고 못 박았다. 이 교수는 “실제 세계를 대변하는 것이 영화의 역할이기도 하지만 수익적인 측면에서도 분석 결과 성평등 영화를 선택하는 관객들이 많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 연구가 상업 영화대상으로만 이뤄졌고 더 많은 젠더 확장성을 확보하지 못한 부분이 아쉽다는 말을 덧붙였다.

본 연구는 KAIST 인문사회과학부에서 추진한 석박사모험연구과제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고, 소셜 컴퓨팅 분야 최고 권위 학회인 ‘컴퓨터 기반 협업 및 소셜 컴퓨팅 학회(CSCW)에 다음 달 11일 자로 발표될 예정이다. (논문명: Quantification of Gender Representation Bias in Commercial Films based on Image Analysis)

허정윤 기자 verit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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