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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 부각에 가려버린 왕양명의 명철보신
애국심 부각에 가려버린 왕양명의 명철보신
  • 교수신문
  • 승인 2019.10.1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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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책| 전쟁의 신 왕양명의 기이한 생애| 저자 둥핑| 역자 이준식|글항아리|페이지 332---조남호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교수)

'칼과 책'은 2010년 둥핑(董平)의 ??왕양명 평전??을 옮긴 것이다. 이 책을 전부 소개하기 보다는 몇 가지 특징적인 점을 살펴보고 평론하려고 한다. 둥핑의 '왕양명 평'은 기존의 왕양명 평전보다 자세하다. 특히 왕양명의 전투를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강서 전투, 이두 평정, 영왕 생포, 사주와 전주 토벌 등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이는 기존의 다른 평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둥핑이 중국 CCTV에서 방영한 ‘백가강단’에서 자세하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둥핑은 왕양명의 전투를 기술하면서 왕양명 측의 기록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영왕 주신호의 생포와 반란 진압을 기술하면서 왕양명의 애국충성심을 강조하였다. 반란의 진압은 “왕양명이 조정의 명령 없이 자발적으로 이룬 공로”(213쪽)이고. “명철보신하면서 반란을 모른 척 할 수도 있었지만”(214쪽)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주신호는 오랫동안 반란을 계획하고 군사력과 영향력을 양성하였다. 황제의 측근 가운데 몇몇 환관이나 일부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을 써서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았다. 반면에 무종은 황제권을 전제화하고 고위관료들을 무시하였고, 환관들을 이용하여 불법적인 수탈을 일삼고, 향략에 빠져 민생을 돌보지 않았다. 따라서 민심이 이반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조정은 주신호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관원을 보내 군사력을 조사하여 감축시켰으나 주신호가 뇌물로 관원을 매수하였다. 
주신호는 1519년 6월 13일 생일에 강서성 지역의 전현직 관료들을 초대하고 반란을 지지하도록 위협하였는데, 반란 음모가 드러남에 따라 반란 예정일을 앞당겨 14일 반란을 일으켰다. 주신호와 왕양명 양쪽의 자료를 보면, 주신호는 일찍부터 왕양명을 주목하고 참모를 보내 왕양명의 의중을 떠보면서 달랬고, 왕양명도 반란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다만 소극적인 반대 입장만을 나타냈다. 왕양명도 주신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식은 잘 알고 있었으며 그의 생일초대장을 받고 주신호 본거지 남창으로 배를 타고 가고 있었다. 왕양명은 15일 풍성(豊城)에서 주신호가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 1천명이 자신을 체포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돌렸다. 주신호의 반란군이 순풍을 타고 왕양명을 추격하는데 왕양명의 배는 역풍을 맞아 느려지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였다. 왕양명은 배에 함께 타고 있던 부인과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자, 부인이 나서서 우리 모자는 칼로 목숨을 지킬 것이라고 죽음을 불사하며 격려한 뒤에야 왕양명이 안심하고 작은 배를 타고 도망쳤다는 야사 기록이 있다. 둥핑은 이것도 자세히 언급하였다.(191-192쪽) 여기에서 왕양명이 원래 6월 초에 복건성 반란을 진압하라는 중앙정부의 지시를 받아 가는 길이었지만 부인과 아들을 동반하여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남창으로 향하였다는 것은 주신호 생일을 축하하려고 갔다는 것을 입증한다. 왕양명이 생일잔치에 참석하려고 떠난 것은 주신호와 무종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예증이다. 
왕양명은 주신호를 체포하고 반란을 진압한 전공을 인정받아 신건백(新建伯)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왕양명 전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은 왕양명이 주신호와 내통하였기 때문에 작위 취소를 주장하였다. 왕양명이 주신호의 선물을 받았고 그의 참모를 만나고 서신을 주고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왕양명의 속마음이 과연 누구에게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시는 주신호가 이길지 아니면 무종이 이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충정의 마음을 갖고 무종의 편을 들었다가 결과적으로 주신호가 이기고 무종이 지게 되는 경우에, 주신호는 왕양명이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죽일 것이다. 
현재 우리 한국 사람들은 왕조의 승패결과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애국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명나라시기의 사람들은 조금 달랐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왕조교체가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전쟁도 많았고 국가권력의 중앙집권화도 컸기 때문에 개인이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담보할 수 없었다.  왕양명이 주신호 생일잔치에 갔고 또한 주신호 반란을 진압하면서 나타낸 명철보신의 태도는 평론하기 쉽지 않다. 왕양명 일생의 꿈은 고향에 돌아가서 조용히 지내면서 학생들과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둥핑을 비롯한 왕양명 전기를 지은 사람들은 왕양명이 개인과 천하의 행복과 국가충성심 사이에서 나타낸 개인의 명철보신 모습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현재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오로지 왕양명의 국가에 대한 애국충성심만을 기리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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