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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3-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3-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
  • 교수신문
  • 승인 2019.10.07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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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홍 ⓒ위키피디아

포경언의 무군자치사상
무군론은 위진남북조 시대(3~5세기)의 포경언(?敬言)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허행의 책이 전하지 않고 <맹자>를 통하여 그를 알 수 있듯이 포경언에 대해서도 갈홍(葛洪, 284~364)의 <포박자>(抱朴子)라는 책으로만 알 수 있다. 그러니 포경언은 갈홍과 같은 시대 사람이거나 그 이전 사람으로 추측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맹자가 허행을 비판하듯이 갈홍이 포경언을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맹자나 갈홍 같은 주류의 책만 남고 허행이나 포경언 같은 비주류는 그들의 책이 남기커녕 남들의 비난을 통해서만 겨우 알려졌다.

도가인 포경언은 우주만물이 음양으로 구성되므로 존비 관계가 설 자리는 없다는 이유에서 유가의 군권신수설을 비판하고 군주제와 군신관계를 부정했다. 나아가 군주제가 백성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그들의 자연스러운 성정에 위배되므로 군주제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군주가 없었던 태고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했다. 포경언은 그 시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고에는 군주도 신하도 없었다.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었다. 속세에 얽매이지 않고 한없이 스스로 만족했다. 서로 다투지도 힘들여 살지도 않고 영예도 수치도 없었다. 산에는 길이 없었고 강에는 배도 없었으며 하천과 계곡이 막혀 서로 왕래가 없었으므로 토지를 겸병할 일도 없었다. 무리를 지어 한 데 모여 살지도 않았으므로 서로 공격하는 일도 없었다. … 말에 꾸밈이 없었고 행위에 거짓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지도 않았고 형별로 백성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포경언은 태고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하여, 노장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즉 “백성은 자기에게 이로우면 그것을 다투려고 한다.”는 것으로 언제 어디에나 사람은 이기적임을 인정한 것이다. 포경언은 유가의 예교나 법가의 엄벌을 핵심으로 하는 군주제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도리어 군주제 하에서 이기심은 더욱 커진다고 했다. 즉 "임금과 신하의 신분이 생기면 변화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본래 수달이 많아지면 물고기가 놀라고, 매가 많아지면 작은 새가 근심하는 법이다. 부리는 사람이 늘어나면 인민은 고통스러우며, 위에 바치는 것이 많아지면 아랫사람은 가난해진다."고 했다.

 

군주와 신하가 없었던 태고에 대해 설명한 뒤 포경언은 전제군주제의 기원을 고찰하고 “유가가 “하늘은 백성을 낳고 군주를 세웠다”고 말하는데 어찌 하늘이 사람을 위해 간절하게 말을 하려고 했겠는가?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면 약자가 복종하게 된다. 똑똑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면 어리석은 자는 그를 섬기게 된다. 복종을 하게 되니 군신의 도리가 생겨나고 섬기게 되니 힘이 없는 백성들이 생겨나게 된다“고 하면서 유가의 군권신수설을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포경언은 사람의 본성은 자유를 원하고 구속을 받으면 기뻐하지 않는데 군주제는 백성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으로 그들의 바람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즉 군주 탄생 이후 백성들에게 좋은 점을 주지 않았고 그들을 위한 어떤 이익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백성들에게 무거운 부담만 가중시켰고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또 가장 개명된 군주에 의한 통치도 군주가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다.     

포경언은 그 대안으로 백성들의 성정에 맡기며 그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 수 있는 ‘무위’의 정치 방식을 제시했다. 즉 ‘무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스스로 행함, 즉 자행의 자치에 맡기는 것이다. 즉 모든 정치 형식을 부정하지 않고 자치의 정치를 주장한 것이다.

불교와 <무능자>
포경언이 살았던 시대의 중국에 불교가 성행했다. 즉 위진시대(魏晉時代, 220~420) 이후였고,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420~ 589)에는 더욱 성행하면서 무부무군(無父無君)을 주장하자 유가만이 아니라 도가도 그것에 반대했다. 위진시대에 도가는 예교를 타파하기 위해 유가에 적대했으나, 남북조에는 예교를 옹호하여 유가와 제휴했다. 도가는 삼파론(三破論), 즉 불교가 나라와 가정과 몸을 파괴한다고 비판했다. 무부무군무신(無父無君無身)이라고 했다.

340년에는 진나라에서 승려에게 군과 부를 공경하라고 명했으나 혜원(慧遠, 334~416)과 같은 승려는 그것에 반대했다. 남북조에 와서는 도교는 중화의 것인 반면 불교는 오랑캐의 것이라고 하여 배척하는 주장도 나왔으나, 불교 측에서는 당연히 이에 반대했다.

수당시대(581~907)에는 유가가 우세했으나 불교도 강성했으며 도교도 조정의 지원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당 중기 이후 환란이 계속되면서 유가에서는 맹자의 민본사상이 강조되고 노장사상이 성행하면서 무군론이 다시 제기되었다. 저자를 알 수 없는 <무능자>(无能子)라는 책에서는 인류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 즉 만류(萬類)의 평등을 주장하고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전통적 관념을 타파했으며, 인류끼리도 마찬가지로 평등하고 자유로워야 한다고 했다.

그 책에 의하면 태고사회는 절대적인 자유 평등의 사회였으나 일을 좋아하는 성인에 의해 파멸되어 맑고 편안한 행복은 점차 감소되고 번잡스럽고 가혹한 고통이 날로 심해졌다. 그 과정은 첫째, 가족만 있고 국가는 없는 반자연사회였으나, 둘째, 다스리고 가르치는 일이 더욱 심해져서 사람들끼리 불평등하게 된 정치사회가 등장하고, 셋째, 원시적 정치사회는 일시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법이 오래 됨에 따라 폐단이 생기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어 윤리적인 정치사회가 되었고, 넷째, 그 뒤로 폐단은 더욱 심해져 사회의 쇠란은 극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과 만물은 다 같이 죽게 되지만 모두가 갖는 기(氣)는 영원하기 때문에 천하가 어지러워도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중국 천자의 존귀함이란 천하를 열로 나누었을 때 1, 2할에 불과하고, 정벌전쟁을 하며 자신을 드높이는 것일 뿐이”고 군주제는 반자연적이라고 비판하여 포경언을 능가했다.

<무능자>는 성인이 명예와 이익의 욕망을 선동하고 인륜의 정감을 과장하며 인의의 덕을 가장한 것을 그만두고, 백성이 자연스럽게 되고 순박과 천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천하가 다시 자유 평등의 상태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즉 이익이 중요하지 않고 명예 또한 숭상할만한 것이 못 되며, 인륜의 정감, 특히 부자 형제의 윤리까지 중요하지 않다고 보아 포경언의 사상을 방불케 했다.

원의 등목과 백련교
송대(960~1279)에 와서 유가가 득세하고 도가는 침몰하면서 무군론도 사라졌다. 유가는 성리학자들인 이학파(理學派)와 공리주의자들인 사공파(事功派)로 나누어졌다. 북송이 쇠약해지면서 국가의 부강을 중시하고 왕도와 함께 패도도 인정하여 법가를 방불케 한 사공파가 대두하여 이학파를 압도했다. 그런 송대에 무군파는 존재할 수 없었다.  

포박자 ⓒ위키피디아
포박자 ⓒ위키피디아

포경언 이후 중국사상사에서 무군파는 천년이 지난 13세기에 와서 원(1271~1388) 초기의 대표적 진보사상가인 등목(鄧牧, 1247-1306)에 의해 이어졌으나, 그는 중국사상사에서 철저히 무시되어 왔다. 그는 ‘삼교외인(三敎外人)’이라 자처하며 어떤 종파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만큼 유·불·선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사상의 소유자로 원나라의 관직 제의를 거부하고 저술에만 종사했으나, 그 저술은 반군주 및 반전제 사상을 이유로 대부분 사라지고 유일하게 <백아금>(伯牙金)만 전한다.

등목은 그 책에서 이상적인 태고사회인 요순시대를 음식이 사치스럽지 않고, 의복이 아름답지 않으며, 궁실이 화려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특권이 없었고, 군주와 백성 사이에 엄격한 구분이나 엄격한 등급의 제한도 없었고, 군주가 직책을 수행할 때에는 반드시 백성을 잘 살폈다고 묘사했다. 즉 군주는 길을 가는 사람을 만나거나 백성의 집을 방문하여 그들의 요구를 명백히 이해했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민생을 구하는 책임을 졌으며,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고 오랜 재해를 다스리며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을 백성에게 주었다고 했다.

등목에 의하면 군주의 생활은 백성의 그것과 다름이 없어 군주가 되려는 자가 거의 없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고 그가 그만둘까 걱정했으며, 따라서 군주는 유가가 말하는 성인이 아니고,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었다. 군주와 마찬가지로 관리가 되려는 자도 없었고, 선비들은 높은 산속에 은거하여 군주가 온갖 정성을 다해 그들을 청했으며, 따라서 관리도 군주처럼 부득이하여 된 것이고 백성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고 했다. 

이처럼 “하늘이 백성을 내고 군주를 세운 것은 군주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닌데 어찌 사해의 넓은 곳을 군주 한 사람의 사사로움을 위해 사용할 수 있으랴,” “오늘날 백성들은 스스로 일해 먹고 살 수 없어 날이면 날마다 화식(貨殖)으로 절취당하고 유혹당해 그것을 착취당하니 또한 도적의 심보가 아니겠는가. 도적들이 일어나 민가를 해치며 백성을 종처럼 부려도 그 피해가 극심한 데까지 이르지 않는 것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리로 인한 피해는 피할 수가 없어 대낮에 횡행하고 천하 백성이 원망은 할지라도 감히 말을 못하고 성을 내어도 감히 처벌을 못한다. 어찌 하늘이 어질지 못하여 바탕을 숭상하고 간교함을 좋다고 하며 호랑이, 이리, 뱀, 버러지 같은 놈들과 더불어 똑같이 백성을 해할 수 있으리요.”라고 현실을 비판했다.

등목은 삼대 이후의 군주는 요순시대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고, 백성은 어리석지 않으며 관리의 착취에 당연히 분노하고 원망하기 마련이므로 그 반항은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등목은 특권이 없는 군주제 이외의 다른 정치체제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즉 중앙관직이나 현령을 없애고 백성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했으나 군주제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즉 무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원나라에는 등목 외에 이렇다 할 사상가가 없었지만 도교와 불교에서 기원한 중국 민간종교인 백련교(白蓮敎)가 등장하여 아나키즘적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여성과 빈민이 환영한 교리는 한 여인이 그 자식을 천년왕국이 도래할 때 하나의 가족으로 모은다는 것으로 불교의 미륵사상과 민간신앙이 혼합된 사상이었다. 물론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비밀결사 형태로 존재했으나, 14세기에 원나라를 멸망시킨 홍건적의 난의 모태가 되었고, 명의 태조 주원장도 백련교도로 출발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명을 세웠다. 청나라에 와서도 백련교도는 정권에 반대하는 비밀결사로 조직되었고 의화단의 모태가 되었다. 특히 1800년 전후 8년간 이어진 백련교도의 난은, 인구가 조밀한 동부 해안지대에서 이주한 빈농과 부랑 노동자 중심의 백련교도가 일으킨 반권력 폭동으로서 통일적인 조직이나 목표나 지도자를 결여하면서도 교묘한 게릴라전으로 청조를 곤경에 몰아넣은 아나키적 반란이었다.


청의 황종희, 당견, 대진

황종희 ⓒ위키피디아
황종희 ⓒ위키피디아

명말청초의 황종희(黃宗羲, 1610년 ~ 1695년)는 양명학의 전통을 승계하여 사람은 누구나 옳은 행동을 가릴 수 있는 양지를 가지며 그런 점에서 근본적으로 평등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본 양명 좌파와 달리, 공부와 수양을 통해 양지를 계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유학의 진면목을 밝히고자 한 고증학의 입장에 섰다. 그가 1663년에 쓴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은 독선적인 군주세습제를 반대하고 사대부 중심의 공론정치를 강조한 탓으로 청말의 개량파와 혁명파에 의해 루소에 비교되었다. 그러나 왕양명이나 이지와 마찬가지로 무군론과는 무관했다.

당견(唐甄, 1630~1704)은 <잠서>(潛書)에서 "진(秦)나라 이래 2000여 년 간의 도살이 끝내 멈추지 않았으니, 슬프다! 어찌 제왕이라는 도적놈들의 해독이 이렇게 극심한 데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한 사람을 죽이고 베 한 필과 곡식 한 되를 취하여도 도적놈이라 부르는데, 천하의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베와 곡식을 죄다 빼앗아 가는데 도적놈이라고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당견도 무군론이 아니라 황종희와 유사한 사대부 공론정치를 주장했다.

유사배가 높이 평가한 청나라 중기의 대진(戴震, 1724~1777)은 주자가 완성한 이기철학이 본질적으로 기보다도 이를 중시하고, 인성에 대해서도 의리의 성을 말하고 기질에 뿌리박은 정이나 욕을 악의 근원으로 삼아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을 비판하고 기의 철학을 주장했다. 즉 기질의 성만을 성으로 생각하고 정이나 욕을 정당한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긍정하여 권력자에게 억압된 하층 사대부나 국민의 입장을 주장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명청대에는 무군론의 전통이 단절되었다.

이상의 무군론에 대해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무시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1999년에 번역된 주일요(朱日耀)의 <전통중국정치사상사>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소공권이나 유택화(劉澤華)의 <중국정치사상사>에서는 무군론을 어느 정도 다루고 있지만, 무군론을 무시하는 중국 현대 정치학의 태도는 중국의 전통적인 반민주주의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주일요 책의 번역본에는 등목을 유목으로 표기하는 등의 오역까지 눈에 띈다. 동아시아 전통사상, 특히 무군론에 대한 재인식이 동아시아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 긴급하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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