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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민주주의 발전 위해 ‘무군론’에 대한 재인식 시급
동아시아 민주주의 발전 위해 ‘무군론’에 대한 재인식 시급
  • 교수신문
  • 승인 2019.10.0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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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연왕에 저항하다 처참하게 살해당해 -방효유(方孝孺,1357~1402)
공자의 권위 도전…중국사상사에서 혁명적 -왕양명(王陽明,1472~1529)
국가사회의 통제로 인한 개성왜곡에 저항 -이지(李贄, 1527~1602)

명의 방효유, 왕양명, 이지

왕양명 ⓒFlsxx/wikipedia
왕양명 ⓒFlsxx/wikipedia

종래 중국의 전통 사상 가운데 아나키즘에 가까운 것으로 명(明, 1368~1644)의 양명학, 특히 양명 좌파를 중시해왔다. 그 앞에 역사가인 방효유(方孝孺, 1357-1402)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폭군인 연왕(燕王)에 저항하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진리의 순교자로 “하늘이 군주를 세운 것은 인민을 위한 것이며, 인민으로 하여금 군주를 떠받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인민은 곡식과 옷감을 군주에게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옳고 그른 것을 고르게 하고, 홀아비와 고아를 돌보고, 빈곤한 자를 구제하고, 무능한 자를 가르치고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경과 공손의 예를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민의 감정이 그런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방효유 ⓒFlsxx/wikipedia

16세기에 와서 각자의 마음에서 윤리를 찾고 능동적인 존재인 개인의 욕망도 인정한 왕양명(王陽明, 1472~1529)과 그 제자들이 등장했다. 그는 “마음으로 탐구하여 아니라면 그것이 공자에게서 나온 말이라고 해도 감히 옳다고 할 수 없다”고 하여 한나라에서 명나라까지 모든 전제정부의 추앙을 받은 공자의 권위에 도전한 점에서 중국사상사에서 혁명을 이루었다. 특히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은 우부(愚夫), 우부(愚婦)와 성인(聖人)이 같다”라고 주장하여 사대부의 계급적 우월을 절대시하는 이념체계인 주자학의 반발을 샀다. 19세기 중국의 아나키스트인 유사배(劉師培, 1884~1919)는 왕양명을 높이 평가하면서 왕양명의 양지설을 루소의 천부인권설에 필적하는 것으로 보았다.

왕양명의 제자 중에는 이른바 ‘양명 좌파’로 불리는 개인주의적 급진파가 등장했고, 그 중에서도 이지(李贄, 1527~1602)가 두드러졌다. 이지는 공맹 우상화를 공격하고 자율적 개성(아기와 같은 천진한 마음인 동심)을 강조하면서 국가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통제 기제들로 인한 개성 왜곡에 대해 저항했다. 특히 <분서>(焚書)에서 “백성들에게 (획일적인) 도덕과 예의를 강요하려고 국가의 형벌을 남용하는 탐욕스러운 거짓 ’인자‘(仁者)의 무리”라고 유가를 비판했다. 그는 진나라 말기 “왕후장상에 어찌 종자가 따로 있겠느냐”면서 만민평등의 기치 아래 중국 최초의 반란을 기도한 진승(陳勝)을 높이 평가하고, 무위도식하는 도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지 ⓒFlsxx/wikipedia

이지는 무위에 입각한 정치를 주장한 점에서 도가와 유사했으나, 도가와 달리 군주가 이룩한 업적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즉 태고의 인간은 금수와 다름없어 요순 이후 작위적인 정책을 실시하는 성인이 필요했으나 무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유가의 등장 이후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해 많은 제도가 필요해졌고, 그 결과 정치가 더욱더 번거로워졌다. 따라서 그는 통치자가 강제수단으로 백성의 생활을 규제해서는 안 되고, 특히 통치자의 사상으로 백성의 사상을 규제해서는 안 되며, 무위에 근거하여 사회에 유익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지는 위진의 완적이나 포경언 등이 보여준 무군론과는 달리 유교적인 유군론에 충실했고 일부 군주를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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