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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비평 : 『제국』(하트·네그리 지음, 윤수종 옮김, 이학사 刊)
본격비평 : 『제국』(하트·네그리 지음, 윤수종 옮김, 이학사 刊)
  • 정성진 경상대
  • 승인 2003.09.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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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량주의 정치로 회귀한 급진적 아나키즘의 수사학

정성진 / 경상대·경제학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은 이론적으로는 그 동안 많이 논의돼 온 세계화론을 포스트구조주의 담론으로 다시 서술한 것에 불과하며, 실천적으로는 고전 맑스주의 전통을 부정한 것으로서 개량주의 정치에 봉사하고 있다.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의 부정

하트와 네그리는 포스트구조주의 담론의 관점에서 오늘 세계는 자본주의를 넘어서 탈자본주의 탈근대 단계로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오늘 서비스화, 정보화에 따라 이른바 '비물질적 노동'의 중요성이 증대하고 사적 소유의 의의가 감소하면서 맑스의 노동가치론이 타당하지 않게 됐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오늘 '제국'에서 작동하고 있는 가치와 공황의 메커니즘도 부정한다. 그들의 '제국'에는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의 핵심인 공황론이 전적으로 부재하며, 위기도 없다.
그러나 정보화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비물질적 노동은 세계자본주의의 중심부에 한정된 현상이며, 세계적 범위에서는 물질적 노동이 여전히 압도적인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 사적 소유의 의의가 감소한다는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도 얼마 전 냅스터 사태에서 보듯이 '신경제'에서도 지적 재산권을 중심으로 한 사적 소유의 문제가 여전히 결정적임을 감안한다면 옳지 않다. 오늘날 세계는 맑스의 노동가치론의 경계를 넘어 선 세계, 즉 자본주의를 넘어 선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의 분석으로서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의 비판적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맑스주의 제국주의론과 미국 지배 현실 부정
하트와 네그리는 현 국면의 세계를 '제국'이라고 명명하고 이는 제국주의를 넘어선 단계의 세계라는 점에서 제국주의와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는 제국은 제국주의간 경쟁과 전쟁 경향의 소멸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ultra-imperialism)의 새로운 버전이다. 이 책에서 맑스주의 제국주의론의 핵심인 국가에 의한 매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트와 네그리는 레닌 제국주의론의 핵심인 '가장 약한 고리'의 이론도 거부한다.
그러나 지구의 상이한 부분들은 자본에 대해 상이한 중요성을 갖는 것이 현실이다. 2001년 9·11 대미테러, 2001년 12월 아르헨티나의 봉기, 2003년 2월 부시의 이라크 침략 등의 사태는 오늘 세계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엄연히 존재함을 입증한다.
오늘의 세계는 미국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이며, 이른바 세계화란 미국 제국주의의 세계적 지배의 확장과정의 다른 말이다. 그런데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에는 어떤 중심적 헤게모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 따르면 제국의 권력은 일종의 '네트워크 권력'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오늘날 세계에서 미국 제국주의 지배의 현실을 명시적으로 부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임은 분명하다.

제3세계의 부정과 '제국'의 찬양
제국주의 개념의 현실성을 부정하는 네그리와 하트는 당연히 민족주의 혹은 제3세계 개념의 의의도 모두 부정한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의 시대에는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와 같은 구별이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즉 제3세계는 제1세계 안으로 들어가 그 중심에 게토와 슬럼으로 자리 잡았으며, 제1세계는 제3세계에 이전돼 주식거래소, 은행, 마천루 형태로, 이제 중심과 주변, 남과 북은 서로 가까이 접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세계의 양극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의 시대에는 국민국가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에 세계화에 대해 국민국가를 대립시키는 것은 반동적이라고 주장한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의 세계는 국민국가들과 경쟁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계와 비교한다면 거대한 진보이기 때문에 제국의 경향을 거부하는 것은 반동이라고 주장한다. 이로부터 하트와 네그리는 당연히 반미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진보진영이 세계화의 흐름에 맞설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야 할 것이라고 권고한다. 그들은 제국이 이전의 권력 패러다임에 비해 더 좋다고 주장한다. 제국은 민족주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종지부를 찍고 사해동포주의적 전망을 열었기 때문에 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에서는 전쟁 경향이 억제되므로 전쟁광 부시에 비하면 제국이 훨씬 좋다고 주장한다.

개량주의 정치로 수렴
자본주의, 제국주의와 같은 고전 맑스주의의 핵심 개념의 현실성을 부정하는 하트와 네그리가 고전 맑스주의 정치의 핵심인 노동자운동의 중심성을 부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전세계 노동자운동이 새로운 공세로 전환하는 획기로 이야기되는 1990년대 후반 프랑스와 한국에서의 총파업도 "죽어 가는 노동자계급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 같은 형국"으로서 "이들 투쟁은 처음부터 이미 늙었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인다"라고 폄하했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의 변혁의 주체로 노동자계급이나 인민이 아니라 이른바 '다중'(multitude)을 주장한다. 그러나 '다중' 개념으로 계급분석을 대체하려는 하트와 네그리의 시도에 대해서는 자율주의에 대해 친화적인 맑스주의자들로부터도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즉 '다중' 개념은 다중 내부에서 계급적 차이의 문제를 경시했으며, 노동 개념의 중심성을 부정했다고 비판받고 있다.
하트와 네그리는 고전 맑스주의 혁명론의 핵심인 레닌주의 정치를 거부하면서 운동에서 조직과 지도의 개념을 거부한다. 그들은 조직과 지도가 취약한 것은 운동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이와 같은 하트와 네그리의 급진적 아나키즘의 수사학은 실제 대안을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면 상투적인 개량주의 정치로 수렴한다. 하트와 네그리가 결론에서 제안하는 이른바 제국에 대한 세 가지 대안 즉, ①세계시민권, ②사회적 임금 수령권, ③ 지식정보 공유권은 실제로는 이들이 부정하는 국민국가를 전제 혹은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도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하트와 네그리가 한편에서는 국민국가가 투쟁의 장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에서 국가 수준에서의 입법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요구를 제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다. 게다가 이들 요구는 제국에 전혀 무해한 체제 내적 요구들이다. 요컨대 네그리, 하트의 대안은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 프로젝트일 뿐이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한국경제에서의 마르크스 비율의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제와사회', '진보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 '제국주의와 한국사회', '한국전쟁과 한국자본주의',  '한국의 부패와 반부패 정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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