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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외 가해자·공동체 변화까지 끌어내야
‘처벌’외 가해자·공동체 변화까지 끌어내야
  • 허정윤
  • 승인 2019.09.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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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를 ‘소송 관문’이 아닌 성평등 질서 구축 기구로
정부 지원 중요하지만 학생이 공동체 회복 주체 돼야
목적에 따른 조정 절차-징계 절차 분리 선행 바람직

지난 24일 한국예술종합대학교(한예종)에서 상습 성폭력을 일삼아 온 H교수의 파면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한예종 영상원 대자보에 따르면 H교수가 술자리에서 여학생의 허벅지 안쪽으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었다고 한다.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19일 강의에서 “(위안부) 직접적 가해자는 일본이 아니고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라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대학 내 성희롱·성폭력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대학의 특수성을 설명하고 ‘대학 내 성평등 문화 확산을 위한 국가 및 학교 당국의 역할’을 촉구하는 발표가 있었다. 교육부가 주최하고 교육부 산하 대학 성희롱·성폭력 근절지원 중앙센터와 (사)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가 주관한 ‘대학 성희롱·성폭력 근절을 위한 양성평등 문화 확산 정책 세미나’에는 대학 내 성희롱·성폭력 업무 담당자(60개 대학 참여), 기관장을 비롯해 해당 문제에 관심을 가진 학생 80여 명이 참석했다.

교육부 교육분야 성희롱·성폭력 근절 자문위원이자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다혜 위원은 이 자리에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일어나고 있고, 대학 내 센터들이 사건해결을 하는 곳이 아니라 형사(소송)로 넘어가는 관문처럼 여겨지는 상황들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학의 특수성을 인지하고, 대학 내 성폭력 사건해결과 성평등 증진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며 발표의 맥락을 짚었다.

대학 공동체는 교원, 학생, 직원 등으로 이루어져 다양한 관계가 형성되는 곳이다. 특히 고용관계나 사제관계에서 성폭력·성희롱 사건이 일어나면 교육권과 노동권까지 침해되는 결과에 이른다. 장 위원은 “교내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성희롱·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폐쇄적인 성격이 짙은 특정 전공에서는 피해자의 취약성이 극단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대학 공동체들도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높은 윤리적 기준과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노력 중이다”라고 말하며 대학 내 움직임을 고무적인 신호로 해석했다. 장 위원은 “성희롱을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문제 제기한 곳도 대학이며(서울대 신 교수, 우 조교 성희롱 사건), 성폭력 대응을 위한 자율적인 절차를 먼저 마련하고 실행한 곳 역시 학생사회라는 점”이 대학이 가지는 특수성이라고 설명했다.

장 위원은 현재 대학 내에서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가 적합하지 않고, 피해자 중심주의와 피해자화 사이에 혼란으로 문제 해결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 내 학칙을 통한 공식절차의 중요한 특징은 가해자를 징계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사법절차가 아닌 대학 공동체 안에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한다는 의미는 대학 내 성폭력을 방지하고 성평등 문화를 증진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장 위원은 “가해자 처분에 집중하는 공식절차 속에서는 교육이 일종의 ‘처분 기능’만 할 뿐 사건을 통해 피해자회복과 공동체 내 질서 구축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덧붙여 “센터(기구) 중심의 사건해결절차는 가해자와 공동체에 변화를 촉구하는 중요한 절차”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사건처리 담당기구의 교내 위상이 낮고, 적은 자원과 부족한 인력 상황이 기구 신뢰도 하락과 직결돼 결국 처벌만 강조되는 실정이다. 2018년 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가 전국 59개 대학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59개 중 57개 대학에서 성희롱·성폭력 사안처리 담당기구를 두고 있지만 전문기구 설치 없이 일반 학생상담센터가 겸직(35.6%)하거나 학내 행정기관이 담당하는 경우(10.2%)가 절반 가까이 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성폭력 사건 해결은 성폭력·성희롱 상담기구 중심으로 전문성을 지닌 인력이 담당하고 사건이 처리된 후에도 지속적인 사후관리를 위한 담당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결국 사건 해결과정에서 2차 피해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고, 오로지 공식절차 진행에만 집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현장에서 나오는 목소리다.

장다혜 성희롱·성폭력 근절 자문위원이 정책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허정윤
장다혜 성희롱·성폭력 근절 자문위원이 정책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허정윤

장 위원은 성평등 문화확산을 위해 대학 내 성폭력 사건 해결과 성평등 증진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장 위원은 “먼저 조정 절차와 징계 절차의 절차적 목적에 따른 분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대학 내 사건처리 과정은 센터 중심의 공식절차와 학생회 중심의 사건해결 절차가 동시에 작동하면 당사자들(특히 피신고인)에게 부담이 가중될 가능성이 높다. 장 위원은 “실제로 학생회를 통한 피신고인이 과도한 요구할 때 부당함을 느낀 가해자들이 명백한 가해 증거에도 불구, 센터가 제시한 공식절차 중 비협조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며 실례를 들었다.

더불어 장 위원은 성평등 문화 확산을 위한 전담기구와 사건처리 전담기구를 분리해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사건처리 전담기구는 조사를 위한 절차적 권한을 가지고 중립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독립성을 갖춰야 한다는 게 장 위원의 주장이다. 장 위원은 “대학 미투 사건들의 경우 사건 처리 과정에서 심의의 불공정성이나 징계위원회에 내에서 교수 편들기가 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건처리를 전담하는 기구를 만들 때, 최종 결정권자인 총장이 권한을 해당 기구에 위임함으로써 기구의 독립성을 확보시켜줘야 한다는 말이다. 원활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성폭력 사건의 특성과 대학 내 권력관계를 이해하는 전문 현장 인력이 절실한 상황이다. 나아가 사건해결이 성평등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전문성을 높여야 하는데, 실상은 많은 학교의 상담사들이 계약직(2년)으로 활동하고 있어 실현 가능성이 낮다.

장 위원은 국가가 대학 내 성폭력 징계절차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심의위원회·외부 전문가 조사위원회·징계위원회·학생을 포함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피해자 권리 규정에 ‘징계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절차진행 및 결과 통보 의무’를 국가 가이드라인에 포함할 것을 당부했다. 더불어 “국가의 역할이 성폭력 예방교육에 한정되지 않고, 대학 내 성평등 정책 확산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담인력의 안정적 고용형태를 성평등 정책의 필수적 이행사항으로 규정 권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세미나에 참석한 이나영 중앙대 교수는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공동체 회복이 문제는 학생이 주체가 되어야 하고 역량이 집중되어야 한다”라며 대학에는 해당 문제를 일으킨 교수는 “‘원스트라이크 아웃’ 정도의 징계를 고려해야 하고 이는 국회에서도 힘을 써야 할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탁경구 한국외대 성평등센터 담당(행정)은 “항상 새로운 관점을 배우고 간다”라며 “성평등 문화 확산을 위해 노력하는 분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자리”라며 세미나가 지속해서 열렸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허정윤 기자 verit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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