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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현대사회윤리연구』 펴낸 진교훈 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 : 『현대사회윤리연구』 펴낸 진교훈 서울대 명예교수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9.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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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인간학의 선구자..."인격은 초시간적 가치입니다"

"도덕이라 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가치를 터득하고 지키는 것이죠"

 진교훈 교수는 1937년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났다. 용정에서 소학교까지 나오고 서울대 철학과를 거쳐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 후반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에 부임한 진 교수는 당시만 해도 주변학문으로 취급되던 윤리학계에 영미 윤리학과 함께 독일, 프랑스 등 대륙 윤리학을 적극 소개해왔다. 특히 철학적 인간학의 분야에서 꾸준히 제자를 길러냈으며, 이를 바탕으로 생명윤리, 환경윤리, 전통윤리의 발견 등 많은 논문을 발표해왔다.

원로 윤리학자로 한국에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낯선 학문을 소개하고 정착시켜온 진교훈 서울대 명예교수(국민윤리교육과)가 정년퇴임 6개월이 지나 본인의 학문적 개인사를 귀결짓는 '현대사회윤리연구'(울력 刊)를 저작 출판했다. 현대윤리학 각 분야의 서론격에 해당하는 글을 모은 이 책은 저자의 제자들이 퇴임을 기념하는 뜻에서 스승의 미간행 논문을 중심으로 몰래 작업한 선물이라고 한다.

크게 보편윤리학, 사회윤리학, 현대사회와 윤리 등으로 나눠 윤리학 전반을 서술하는 이 책은 2세대 서양윤리학자의 이론과 실천을 동시에 조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첫번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5명이 한 사무실을 쓰는 명예교수 공동연구실에 매일 나와 3개월 후 열리는 해외학술대회 발표문을 벌써부터 준비중이라는 진 교수를 찾아갔다.

사실 이 책은 잘 읽히지 않는다. 경험과학에 익숙한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선험적 이해와 가치를 역설하는 주장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도대체 인간에게 아직 역사적 상대화가 불가능한 영역이 남아있단 말인가. 다짜고짜 그것부터 질문을 던졌지만, 진 교수는 역시 단호하다.

"도덕이라 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가치를 터득하고 지키는 것이죠. 사회진화론이 도덕도 진보한다고 말한 이래 가치상대주의를 표방하는 글들이 우리의 근대를 탈가치화시켰지만, 나는 어떤 경우라도 인격가치는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초시간·공간적인 가치죠."

인간을 동물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행동심리학', 혹은 자크 모노처럼 인간정신을 물리화학적인 반응으로 간주하는 인간-기계의 관점에 대해 진 교수는 비판적이다. 이런 적대감은 다윈과 헤켈 같은 생물진화론자들에게까지 소급된다.

진 교수에게 최근 1백만 관객이 넘어선 '바람난 가족'이라는 영화는 어떻게 다가올까. 우리 사회가 '바람'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것 같다는 말에 그는 "수오지심을 모르는 피동적 주체들의 기계화된 삶"이라고 일축한다.

"性은 인격가치와 관련시켜서 존중해야 합니다. 과거에 독일 함부르크의 의사들이 스와핑을 했다가 집단자살소동을 벌이는 것을 보세요. 부부 사이의 성은 독점적, 개인적인 것이라 이것이 무너지면 인간도 무너지는 겁니다."

문명에는 오르내림이 있는데 전환기에는 항상 성적 문란이 나타난다는 그의 말은 쉽게 말해서 요즘이 말세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언제 말세 아닌 적이 있었나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한편으로 이 단호한 윤리학자의 개인적 삶이 궁금해졌다. 진 교수는 어릴 때부터 인생은 苦海라는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6·25 동란 때 엄청난 주검을 목격했다. 친구 아버지가 인민재판으로 사라지는 모습, 식칼에 찔려죽은 옆집 어른들, 교수되는 사람, 폭격으로 집 바로 앞에서도 사람들이 죽었다. 9·28 수복 때 아현동 고모댁을 안부차 방문하고 돌아오던 중, 동아일보사 앞을 지나는데 눈앞에서 네이팜탄이 터져 사람들이 비명횡사하는 꼴을 목격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죽는가. 어머니가 병약하셔서 또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왜 아픈가,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가. 그래서 철학, 의학, 종교학을 함께 공부한 슈바이처, 야스퍼스, 셸러 등의 저서에 매력을 가졌죠. 빈대학 유학시절 철학박사가 통과된 뒤에 의학사교실에서 정신의학을 마음먹고 공부하기도 했죠. 집안사정이 어려워 계속할 수는 없었지만 의학철학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습니다."

이 종합과학으로서의 의학에서 발전한 것이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이다. 진 교수는 국내에 프랑클과 빈스방거의 의학철학을 적극 소개하고, 1987년 국내 최초로 한국철학회에서 '의학과 철학의 대화의 중요성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기도 했다. 생명복제를 비롯해 생명경시문화의 원인을 짚고 성찰하는 논문으로 계속 발전시켜나갔는데, 이 학문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인간은 몇가지 이유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깊이있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모든 질병은 유전적 소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전적 결정론은 그야말로 "웃기는 얘기"라고 호통을 친다. 인간학이란 말을 처음 쓴 오토 카스만 같은 사람은 우리의 신체가 다른 부위와 불가분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주장했는데, 진 교수는 서구철학의 이런 유기체적 시각을 동양의 영향에 있다고 말한다.

"18세기까지는 인도나 아라비아 등지의 의학이 서구보다 월등히 앞섰다는 걸 알아야 해요. 선교사들이 동양에 왔다가 동양의 인간이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서 갔죠. 인간에 대한 서구의학의 자기반성적 담론이 철학적 인간학의 기원입니다."

이런 철학관이 실천적 윤리학이 되기 위해선, "인간사회에서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 이상적인 이성상은 무엇인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진 교수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런 올바른 방향성은 주관적 자유주의자의 사회관 즉, "사회는 필요에 따라 만들고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서는 나올 수 없다. 동양학적으로 말하면 體와 用 중에 그것은 용에 불과하고, 체에 해당하는 본질로서의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인격 속에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그것은 자아, 가족, 민족, 국가가 서로를 양파처럼 감싸고 있는 구조라고 진 교수는 강조한다.

"혁명이라는 것도 사실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옛것으로 돌아가자는 온고지신의 복고운동입니다. 프랑스혁명, 권리장전 같은 것들이 물론 변두리 왕족의 쿠테타라는 정치적 맥락이 있긴 하지만, 그것의 플랜카드는 인간의 기본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거든요. 새로운 것으로만 대안적인 것을 구성하려는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진리는 이미 주어져 있고 우리의 할 일은 가려진 것(cover)을 벗겨서(dis) 알아낼 뿐이라는 게 진 교수의 학문의 기본원칙인 셈이다. 이번 저술을 보면 그런 선험적 인간가치와 전통의 재발견을 통한 한국사회에 대한 분석과 계도가 일관되게 진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 교수는 남북통일의 문제도 이 관점에서 본다. 현재는 현실의 변동상황에 따라 기본원칙이 너무나도 왔다갔다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통일불가론도 나오는 것을 그는 비판한다.

"희망은 현실에서 이뤄질 수 있는 확률과는 관계없는 감정입니다. 남북통일도 현실적 이해에 따라 얘기되는 것을 나는 반대합니다. 같은 언어, 풍속을 가진 사람이 대동단결할 수 있다는 게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것이거든요."

세상은 윤리학의 관점에서만 따져질 수는 없을 것이다. 진 교수의 주장에는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거나, 혹은 선악과 시비의 논리가 많아서 다원적 가치를 존중하는 입장에서는 고담준론으로 비쳐질 여지도 있다. 하지만 그 신념으로서의 윤리학이 역사적으로 형성돼 온 과정과, 인간에 대해 갖고 있는 그 학문의 실질적인 애정이 합쳐져서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무게만큼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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