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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2) 그리고 한반도에서 가장 혹독한 욕(애비 없는 놈)이 됐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2) 그리고 한반도에서 가장 혹독한 욕(애비 없는 놈)이 됐다
  • 교수신문
  • 승인 2019.09.2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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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 양주, 묵자

허행과 같은 길을 간 사람으로는 묵자(墨子, 470~391), 장자의 길을 간 사람으로는 열자(列子, 기원전440?~370)가 있다. 열자의 존재 자체에는 의문이 있고 맹자보다 조금 앞선 사람으로 알려질 뿐 그 전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의 말을 적은 책이라고 하는 <열자> 8편은 현존한다. 그 중 ‘황제’ 편에서 황제의 꿈을 빌어 그 이상국인 ‘화서씨(華胥氏)의 나라’를 “우두머리가 없고 자연히 살 뿐이다. 그 백성에게는 즐기고 좋아함이 없고 자연히 살 뿐이다.”라고 한 것은 노자의 ‘소국과민’을 답습한 것처럼 보이지만 ‘소국과민’이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반면 비현실적이고 비사회적인 신선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지

묵자는 허행과 달리 그의 글을 모은 <묵자>가 현존하여 이를 통해 허행보다 자세히 알 수 있지만, 허행처럼 사후 오랫동안 잊힌 사람이었다가 20세기에 와서 재발견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도 맹자를 비롯한 유가들에 의해 비판을 받은 탓이었다. <맹자> ‘등문공 상’ 편에도 허행에 이어 묵자를 비판한 부분이 나온다. 그것은 상례를 중시하지 않는 묵자의 제자 이지(夷之)가 유가의 후장(厚葬)주의를 비판하자 맹자가 그것을 비판하고 이에 이지가 승복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두고 김용옥은 이지가 “진상과 달리 융통성이 있었고 반성도 있는 폭넓은 인간”으로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유가의 후장주의를 찬양하지만(340쪽) 화려한 장례를 찬양함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맹자> ’등문공 하‘ 편에서 맹자는 “천하의 여러 주장이 양주가 아니면, 묵자에게 귀속된다. 양씨는 위아(爲我)를 주장하니 이것이 무군(無君)이고, 묵씨는 겸애(兼愛)를 주장하니 이것이 무부(無父)다. 무부무군은 바로 금수다. … 양·묵의 도가 그치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날 수가 없으니 사설(邪說)이 백성을 속여서 인의를 막게 된다. … 무부무군은 주공(周公)이 응징하는 대상이다. 나도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아 사악한 주장들을 그치게 하고 비딱한 행실들을 막고 잘못된 말을 추방하여 세 성인을 계승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한다. 

위 문장의 처음에서 양주와 묵자가 천하의 언론을 지배한다는 것은, 당시 노장이 은둔자로서 주로 변경지방에서 유행한 반면 양묵은 유가와 함께 중원 도시를 중심으로 성행하고, 유가가 지배층인 사대부의 이익을 대표한 반면 양묵은 상공업자 중심의 시민과 지식층의 사상으로 유가와 적대했음을 보여준다고 쿠라하라는 말하지만(170쪽) 반드시 그렇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맹자는 <맹자> ‘진심(盡心) 상’ 편에서 “양자가 위아를 취하니 자기 다리의 털 한 오라기를 뽑아 천하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있을지라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양주를 극단적 이기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사람들을 이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열자> ‘양주’ 편에서는 양자가 “사람마다 털 한 오라기를 손상시키지 않고 사람마다 천하를 이롭게 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저절로 잘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생각을 버리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고 양자가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비자는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의롭더라도 위태로운 성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며, 천하 사람들의 큰 이로움을 자기 다리의 털 오라기와 바꾸지 않았다”고 하여 여러 임금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는 맹자와 전혀 다른 평가이다.      

맹자의 주장은 공자(기원전551~479)의 가부장주의가 양·묵의 비판에 직면하자 더욱 강하게 가부장주의를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용옥은 이를 “참으로 장쾌한 맹자의 논설”이라고 하지만 쿠라하라가 말하듯이 맹자는 “공자와 똑같이 본래 의미의 군자와 소인을 차별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을 명백히 하며, 세습적인 귀족의 지배와 그 가부장적·신분적 입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49쪽) 따라서 ’장쾌‘하기는커녕 계급차별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맹자의 위 말에서 쿠라하라가 주목하지 않은 점은 맹자 자신 이전에 이미 주공이 무부무군론을 응징하였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한 점이다. 주공은 기원전 12세기에 살았던 자로서 그 당시부터 무군무부론을 응징했다고 하니, 그런 주장이 이미 그때부터 있었다는 것이 되지만, 우리로서는 누가 그런 주장을 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전의 중국 태고시대에도 다른 지역의 원시시대에서와 같이 무군무부의 사회가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여하튼 맹자 이래 무군무부라는 말은 동아시아에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다른 종교가 들어올 때에 그 종교들을 비난하기 위해, 또는 유교 내에서 다른 유파의 등장을 비난할 때면 언제나 사용된 문자가 되었다. 특히 이단배척이 유독 심했던 한반도에서 그러했다. 그래서 무부무군이란 ‘애비 없는 놈’이라는, 한반도에서 가장 혹독한 욕이 되었다.        

왕양명
왕양명

 

맹자의 양묵 비판
<맹자> ‘진심’ 하편에서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대단하지 않다”거나 “백성의 옹호를 받으면 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맹자는 민본주의자로 평가되지만 사실은 친족과 친하게 지내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존경하는(親親尊尊) 등급 원칙을 당연한 것으로 보아 민본주의는 전제군주이론을 보완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맹자 이래 2천년 이상 유학이 동아시아를 지배하면서 전제군주정은 그 정치의 원리였다. 물론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어느 것이나 민주주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묵자와 양주의 사상이었으나 그거들은 항상 배척당했다. 

묵자의 겸애가 모든 인간에 대한 무차별적인 평등한 사랑임에 반하여 공자나 맹자가 주장한 인(仁)은 혈연적인 친소와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차별적인 사랑을 뜻했다. 공맹이 말하는 군자란 신분이 높은 사람이고, 소인이란 농상공 등의 노동에 종사하는 생산자를 말하고, 인은 군자의 덕목인 반면 생산자는 이익을 덕목으로 한다고 주장되었다. 반면 묵자는 <묵자> ‘상현’(尙賢) 상편에서 농상공인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관이 항상 귀한 것이 아니고 백성이 항상 천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묵자는 신분제 자체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제로 한 평등 대우를 주장한 점에서 역시 완전한 민주주의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한편 묵자가 후장을 경계한 것은 그로 인해 “천하가 빈곤해지고 인민이 줄어들고 나아가 어지럽혀지”기 때문에 절제를 주장한 것이지 무부를 주장한 탓이 아니라는 것을 <묵자> ‘절장’(節葬) 편에서 알 수 있으므로 제사를 둘러싼 맹자의 묵자 비판은 옳지 못하다. 맹자는 평소에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음을 그 제자인 팽경(彭更)이 맹자에게 그가 수많은 수레와 수행인이 수반 들게 했다고 말한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맹자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니 사치스럽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김용옥은 그런 “오기 때문에 그래도 선비의 도덕적 기능이 존중되는 그러한 사회적 기풍이 조선 5백년의 역사를 통하여 형성되어 왔고, 오늘 우리 사회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다”고 하여 그가 TV 강연 등을 통하여 엄청난 강의료를 받는 대단한 명강사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반면 쿠라하라는 이로부터 “전국시대 말기에 부자들에게 기식하면서 장례절차나 봐주고 생활하였던 유가의 말류, 즉 천유(賤儒)가 나타나게 되는 하나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70쪽) 맹자를 그런 천유의 하나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런 천유가 전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존재했고,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늘어났으며, 특히 유교가 20세기 초 나라를 망친 주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한반도에서 유독 많은 것도 사실이다.    

묵자는 공맹과 달리 만인평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당대의 어떤 주장보다도 진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허행을 묵가로 보는 견해에 따른다면 허행도 마찬가지로 반전 평화를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허행을 자유와 자치와 자연에 충실한 동아시아적 삶의 방식을 주장하고 만민평등을 역설한 최초의 이단이자 비주류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쿠라하라는 장자의 길을 간 사람이 열자라고 했지만, 양주를 노장의 계승자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양주는 노자가 <노자> 23장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사상을 발전시켜 인간성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아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열자> ‘양주’ 편에 나오는 양주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볼 수 있다. “태고 사람은 생이 잠시 머무는 것이고, 죽음은 잠시 가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마음대로 움직여도 자연상태를 벗어나지 않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명예의 유혹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고, 본성대로 삶을 즐겼다. 만물을 거스르지 않았고, 사후의 명예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형벌이 그에게 미치지 않았다. 명예의 유무와 수명의 다소는 헤아릴 바가 아니었다.”  

열자
열자

<열자> ‘양주’ 편에서는 백성이 불안한 이유를 장수, 명예, 지위, 재물을 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맹자가 위아를 주장한 양주를 짐승이라고 비난한 것과 달리, <한비자> ‘현학’(顯學) 편에서는 양주가 위아를 주장하여 “세상의 군주가 그를 따르고 예로 대하며 그의 지혜를 귀하게 여기고 그의 행동을 고상하게 여겨 외물을 가볍게 보고 생명을 중시하는 선비라고 생각한다”고 했음이 이해된다. 즉 “외물을 가볍게 보고 생명을 중시하는” 것이 양주 사상의 핵심으로 이를 이유로 여러 군주의 존경을 받았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도 양주는 당시 10명의 현인 중 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맹자가 양주를 비판한 이유는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에 대해 양주는 그것도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인위적인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양주는 이념이나 가치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공격하고 심지어 전쟁을 통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비판했다. 따라서 양주가 군주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았는데 그렇다고 주장한 맹자에게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양주의 사상은 당시의 엄혹한 현실에 대응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여 곧 사라졌다. 즉 맹자가 비판하듯이 군주를 부정한 탓이 아니라, 생명 중시만으로는 현실 해결에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생명사상이라는 것이 친체제적인 것인 한 현실 해결에 무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무군파와 도교 
<장자>는 내편(內篇)과 외잡편(外雜篇)으로 구성된다. 내편과 달리 외잡편을 장자 자신의 글로 인정하지 않고 장자 후학의 작품으로 보는 리우샤오간(劉笑敢, 1947~)의 견해에 따라, 앞에서 언급한 ‘거협’편을 비롯하여 외잡편의 ‘도척’(盜?) 등 7편의 저자를 무군파(無君派)라고 한다. 무군파는 “허리띠 고리를 훔치면 목이 베이고 나라를 훔치면 제후가 된다”고 하면서 어리석은 군주는 물론 현명한 군주의 통치에도 반대했다. 나아가 중국 고대의 황제로부터 문왕까지 역대 성군이라고 칭송된 군주들을 모두 비판하고, 이어 “도둑치고는 이렇게 큰 도둑이 없는데 천하 사람들이 왜 너를 도구(盜丘)라 하지 않고 나를 도척(盜?)이라고 하는가”라고 했다. 여기서 도구란 공자를 말한다. 

무군파가 군주를 비판하는 이유는 군주가 세속의 이익에 사로잡혀 참된 인간성을 갖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참된 가치판단의 기준인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을 무군파가 어겼다고 본 탓이다. 무군파에 의하면 군주가 백성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통치하면 백성은 참된 본성에 따라 살 수 없고, 결국은 백성의 삶이나 나라를 망친다. 나아가 무군파는 통치자는 물론이고 그를 위하여 봉사하는 지식인까지 비판하므로 ‘무군’이란 통치자와 통치체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렇게 해야 완전한 무위, 즉 어떤 통치도 없앨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무군파가 장자의 현실초탈을 넘어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은 장자철학에 대한 중요한 개조이자 발전으로서 지금 우리가 높이 평가해야 할 점이다. 

무군파가 현실에서 어떤 기능을 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전한(前漢, 기원전220~기원후8)이 망한 뒤 후한(後漢, 25~220)이 건국되면서 삶이 어려워진 농민을 중심으로 한 오두미도(五斗米道)와 태평도(太平道) 등의 결사와 함께 등장한 중국의 종교인 도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태평도는 <삼국지>에 나오는 황건적의 두령인 장각(張角)이 일으킨 조직으로 철저히 진압당해 이어지지 못했지만, 오두미도는 조조(曹操)에게 투항하여 천사도(天使道)로 이어져 중국 도교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한반도에도 들어와 고구려 말엽에 크게 유행했다.   

도교는 중국 최초의 도교 경전인 <태평경>을 편찬한 황로도(黃老道)를 계승하고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를 편찬했다. 두 책에 의하면 우주의 근원인 무형의 원기(元氣) 또는 도기(道氣)가 음양오행을 통해 유형의 모든 사물을 만들어낸다. 이는 도가와 음양가의 기론적 우주관을 계승한 것으로, 원기는 태양과 태음 및 그 조화인 중화로 분화되어 천 지 인, 해 달 별, 부 모 자녀, 군주 신하 백성 등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천인합일 이론과 함께 도교에서는 그 실현을 위한 수양론을 중시했다. <태평경>은 ‘육죄십치결’(六罪十取決)에서 “재물을 담당하는 사람이 그 축적에만 힘쓰고 다른 사람이 굶어죽거나 얼어 죽는 것을 방기한다면 그 역시 중대한 범죄”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이 당시의 빈곤한 농민들에게 감동을 주고, 아나키즘적인 상호부조의 이념을 퍼트렸을 수도 있었다. 

 

완적, 유령, 도잠
유가의 유군론은 <맹자> ‘만장’(萬章) 상에서 “하늘이 천자에게 천하를 준 것은 백성이 천자를 수용하고 그 삶을 편하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설명되었지만 후한(後漢, 25~220) 말에서 삼국(220~280) 및 서진(西晉, 265~316)에 이르는 시대에 왕실이 부패하고 사회혼란이 끊이지 않은 현실에 대한 설명일 수 없어서 많은 무군론자가 등장했다.  

그러나 한나라의 도가에서는 왕충(王充, 27~?)이 유일했다. 그는 무군론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소공권이 말하듯이 그 사상의 논리적 귀결은 무군론이었다. 주저 <논형>(論衡)에서 천(天)의 의지에 의하여 자연과 사회가 지배된다고 하는 유교의 천인감응의 신권설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맹의 언행도 비판하고 숙명론에 사로잡힌 채 생애를 끝마쳤으나 중국 중세를 통하여 가장 혁신적인 철학을 수립했다. 

위진의 죽림칠현에 속하는 완적(阮籍, 210~263)과 유령(劉伶, 221~300)도 무군론을 전개했다. 완적은 <대인선생전>에서 무군과 무신(無臣)을 주장했다. 즉 태고에는 순박한 상태에서 백성이 모두 편안했고 “군주가 없어 삼라만상이 안정되었고, 신하가 없어 만사가 순조로웠”으나 뒤에 제도가 생겨나 고통까지 수반되었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음을 만들어 소리를 어지럽히고, 색을 만들어 형체를 파괴하고, 밖으로는 면모를 바꾸고 안으로는 감정을 숨긴다. 욕심을 품어 많은 것을 추구하고, 거짓과 기만으로 명예를 쫒는다. 군주라는 직위가 세워지면 포악함이 나타났고, 신하라는 직위가 생기면 도적들이 생겨났다. 가만히 앉아 예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곧 아래 백성들을 속박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처럼 정치를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본 완적의 무군론은 노장의 현실비판보다 더욱 격렬한 비판이었다. 완적과 같은 무군론자였던 유령은 <주덕송>(酒德頌)에서 대인선생은 “행동에 걸림이 없었고 집이든 갈대숲이든 거처를 가리지 않았으며, 하늘을 천장삼고 땅을 자리삼아 뜻대로 멋대로 살아갔다”고 했다. 

죽립칠현보다 100년쯤 뒤에 태어난 도잠(陶潛, 365~427)도 무군론자였다. 그의 <도화원기>(桃花源記)나 시에서 묘사한 세상은 노자의 “늙어 죽도록 서로 왕래가 없는” 조건과 합치되고, 군주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 시에서 “가을이 익어도 왕의 세금이 없다”고도 노래했다. 그러나 죽림칠현이나 도잠은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오직 자연주의 은둔사상가로 왜곡되었다. 그들의 무군론을 민주주의로 부활시켜야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뿌리가 비로소 튼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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