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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비평 : 극단 돌곶이의 '물질적 남자'를 보고
연극비평 : 극단 돌곶이의 '물질적 남자'를 보고
  • 심정순 숭실대
  • 승인 2003.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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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된 몸에 대한 두 개의 따뜻한 시선

심정순 / 숭실대·연극평론가

삼풍아파트 붕괴사고는 한번은 반드시 그 의미를 짚고 가야할 우리 사회의 잊혀지지 않은 트라우마다. 황지우 작가와 윤정섭 연출은 이 트라우마의 기억을 어떻게 공연으로 풀어낼까. 제목을 보니, 아마도 요즘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몸과 물질성과 관련해서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극장에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붕괴 현장이 좌악 펼쳐진다. 무대바닥이 움푹 파여있고, 그 맨 밑바닥에는 함몰된 지하층위가 있다. 이 층위에 인간의 몸을 한 실물크기의 금속성 잿빛색의 인형이 죽음처럼 놓여있다. 이 인형은, 매몰된 한 중년 남자의 몸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인형의 몸은, 그 몸 바로 뒤에 숨은 한 사람에 의해 조종된다. 몸의 물질성을 강조하는 구도다. 이보다 좀 높은 층위에 지상의 인간 삶의 층위가 있다. 붕괴 현장 한쪽 끝에는, 무너져 내린 천정의 일부에 식탁이 차려져 있다. 매몰된 바로 그 남자의 집안 내부다. 이렇게 이 공연의 공간 구성은 파편적이다.


그런데, 이 붕괴 현장의 시각적 체현이 생생한 호소력을 뿜어낸다. 이 공연의 무대 장치는 하나의 훌륭한 설치 미술이라 할 만했다. 동시에 이 공연의 의미를 한눈에 전달해주는 막강한 표현력을 가진 기호다. 여기에 극적 스토리가 첨가됐다. 몇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와 그들 각자의 움직임들이 첨가됐다. 공연은 움직여야 하니까.
한 중년남자는 삶의 권태 속에서, 한 10대 여고생과 원조교제를 한다. 그녀의 몸이 갖고있는 싱싱한 생명력 때문에. 그렇다고 이 남자가 자신의 부인을 증오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삶이 권태로울 뿐이다. 그래서였나. 여고생 생일선물을 사들고 나오다가, 부인 생각이 나서 다시 백화점에 들어갔던 그 남자는, 그만 건물붕괴라는 삶의 우연성에 여지없이 휘말리게 된다.


공연이 시작되면, 백화점 붕괴의 '그때 그 순간'이 재현된다. 깜깜한 암전과, 짙은 페퍼포그의 연기 속에서, 또 앉은 바닥이 흔들리는 굉음 효과 속에서 한 10여분간(?) 체험적 '고문'을 당한다. 이런 시뮬레이션 상황에서도 공포감이 드는데, 실제로 어떠했을까. 한편으로는 이렇게 '긴' 체험을 해야만 하나, 이 예술이 꽤 사실주의적 방법론을 깔고 있다는 생각도 떠오른다.


공연은, 매몰된 남자의 몸이 지각할 수 있는 시간만큼, 그의 흐려져 가는 의식이 인식할 수 있는 시간만큼만 계속된다. 그 의식 속에는, 지상의 삶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혼재한다. 동시에 그의 의식 밖, 지상에서 벌어지는 그의 아내에 관한 삶의 편린들도 동시에 혼재돼 있다. 지하와 지상의 삶의 경계가 해체돼있다. 이 모든 것이 혼재하는 공간 속에서, 한 삼베 옷 입은 노인은, 생명력이 강하다는 진짜염소를 끌고 다니기도 하고, 지상과 지하의 공간과 의식차원을 넘나든다. 이 존재가 누구인가. 역시 관객의 상상력을 넘나든다.


결국 '인형/남자'의 의식의 작동이 끝남과 함께 공연도 끝이 난다. 재미있는 것은 끝 장면에서 이 인형/남자의 몸이 하늘 쪽을 향해 높이 떠오른다는 점이다. 이 장면의 해석 역시 관객의 상상력에 맡겨야겠지만, '저 몸이 공중위로 떠오르는 순간 분해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능하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인형의 몸이 떠오르는 행위는, 작가와 연출의 입장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인간 몸에 대한 일말의 사랑에 대한 따스한 제스츄어일까.


윤정섭의 연출과 무대미술은, 깊은 통찰력과 적확한 공간-리듬감각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 몸과 물질성의 질문을 세련된 추상성, 관념성으로 구체화시켰다. 황지우의 사실적 대사는 삶의 따뜻함이 묻어나지만, 연출의 스타일과 차이를 보인다. 이 또한 각기 다른 종류의 물질성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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