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순 / 숭실대·연극평론가
극장에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붕괴 현장이 좌악 펼쳐진다. 무대바닥이 움푹 파여있고, 그 맨 밑바닥에는 함몰된 지하층위가 있다. 이 층위에 인간의 몸을 한 실물크기의 금속성 잿빛색의 인형이 죽음처럼 놓여있다. 이 인형은, 매몰된 한 중년 남자의 몸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인형의 몸은, 그 몸 바로 뒤에 숨은 한 사람에 의해 조종된다. 몸의 물질성을 강조하는 구도다. 이보다 좀 높은 층위에 지상의 인간 삶의 층위가 있다. 붕괴 현장 한쪽 끝에는, 무너져 내린 천정의 일부에 식탁이 차려져 있다. 매몰된 바로 그 남자의 집안 내부다. 이렇게 이 공연의 공간 구성은 파편적이다.
그런데, 이 붕괴 현장의 시각적 체현이 생생한 호소력을 뿜어낸다. 이 공연의 무대 장치는 하나의 훌륭한 설치 미술이라 할 만했다. 동시에 이 공연의 의미를 한눈에 전달해주는 막강한 표현력을 가진 기호다. 여기에 극적 스토리가 첨가됐다. 몇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와 그들 각자의 움직임들이 첨가됐다. 공연은 움직여야 하니까.
한 중년남자는 삶의 권태 속에서, 한 10대 여고생과 원조교제를 한다. 그녀의 몸이 갖고있는 싱싱한 생명력 때문에. 그렇다고 이 남자가 자신의 부인을 증오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삶이 권태로울 뿐이다. 그래서였나. 여고생 생일선물을 사들고 나오다가, 부인 생각이 나서 다시 백화점에 들어갔던 그 남자는, 그만 건물붕괴라는 삶의 우연성에 여지없이 휘말리게 된다.
공연이 시작되면, 백화점 붕괴의 '그때 그 순간'이 재현된다. 깜깜한 암전과, 짙은 페퍼포그의 연기 속에서, 또 앉은 바닥이 흔들리는 굉음 효과 속에서 한 10여분간(?) 체험적 '고문'을 당한다. 이런 시뮬레이션 상황에서도 공포감이 드는데, 실제로 어떠했을까. 한편으로는 이렇게 '긴' 체험을 해야만 하나, 이 예술이 꽤 사실주의적 방법론을 깔고 있다는 생각도 떠오른다.
공연은, 매몰된 남자의 몸이 지각할 수 있는 시간만큼, 그의 흐려져 가는 의식이 인식할 수 있는 시간만큼만 계속된다. 그 의식 속에는, 지상의 삶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혼재한다. 동시에 그의 의식 밖, 지상에서 벌어지는 그의 아내에 관한 삶의 편린들도 동시에 혼재돼 있다. 지하와 지상의 삶의 경계가 해체돼있다. 이 모든 것이 혼재하는 공간 속에서, 한 삼베 옷 입은 노인은, 생명력이 강하다는 진짜염소를 끌고 다니기도 하고, 지상과 지하의 공간과 의식차원을 넘나든다. 이 존재가 누구인가. 역시 관객의 상상력을 넘나든다.
결국 '인형/남자'의 의식의 작동이 끝남과 함께 공연도 끝이 난다. 재미있는 것은 끝 장면에서 이 인형/남자의 몸이 하늘 쪽을 향해 높이 떠오른다는 점이다. 이 장면의 해석 역시 관객의 상상력에 맡겨야겠지만, '저 몸이 공중위로 떠오르는 순간 분해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능하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인형의 몸이 떠오르는 행위는, 작가와 연출의 입장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인간 몸에 대한 일말의 사랑에 대한 따스한 제스츄어일까.
윤정섭의 연출과 무대미술은, 깊은 통찰력과 적확한 공간-리듬감각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 몸과 물질성의 질문을 세련된 추상성, 관념성으로 구체화시켰다. 황지우의 사실적 대사는 삶의 따뜻함이 묻어나지만, 연출의 스타일과 차이를 보인다. 이 또한 각기 다른 종류의 물질성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