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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26) 주제 사라마구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26) 주제 사라마구
  • 교수신문
  • 승인 2019.09.2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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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을 받은 '불친절한 익숙함"
정세근 교수
정세근 교수

여기서 주제는 호세다. 에스파뇰에서 호세(Jose)지만, 포르투갈 말로는 주제라 읽는 모양이다. 사라마구(Saramago)도 포르투갈 발음이라 ‘o’가 ‘우’로 읽히고 있다. 
주제 사라마구는 포르투갈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아서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그의 문체, 아니 정확히는 글 쓰는 방식이 특이하다. 마침표와 쉼표 말고는 문장부호가 없다. 문단도 거의 나누지 않는다. 그러니 대화부분에서는 누가 말했는지 알아서 읽을 일이다. 게다가 장이 있기는 한데, 장의 번호도 제목도 없다. 참으로 불친절하다. 

불친절하기는 한데 그의 쓰는 속도에 맞추어 읽다보면 익숙해진다. 아무래도 읽은 것이 쓰는 것보다는 빠를 테니 그의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처럼 읽으면 된다. 글쎄, 녹음을 해놓고 옮겼더라도 문장의 양을 보면 상당하니, ‘마구’ 읽어야 한다. 그래서 사라마구인지. 
‘주제’도 보통 특별한 것이 아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되었을 때 벌어지는 이야기가 대표작이다. 상상해보라. 무엇이 가장 문제가 되겠는가? 

부끄럽게도 나는 그를 몰랐다. 텔레비전에서 어떤 영화가 지나가는데 표현법이나, 비록 부분이지만 잠깐이라도 줄거리가 특이해서 찾아보았더니, 원작이 주제 사라마구란다. 참내, 노벨상수상작이 영화화된다? 드문 일이다. 대체로 무겁고 그 문학성의 전달여부 때문에 쉽지 않은 것일 텐데, 내가 아는 그의 영화만 하더라도 두어 편이나 된다. 배우가 할리우드 스타(제이크 질렌할)라서 더욱 신기했다. 

그의 상상력은 어느 날부터 사람이 안 죽거나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백지투표를 하는 데부터 펼쳐진다. 아니면, 등기소 직원이 그냥 어떤 사람을 찾으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영화화된 것 가운데 볼 만한 것은 ‘적’(enemy)으로 제목을 달았는데 원제는 도플갱어다. 내용은 어느 날 나와 이름 말고는 모두 똑같은 사람을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방학이면 소설 보는 잔치에 이번에는 주제 사라마구가 초대되어 두어 달을 함께 보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학생들도 꽤나 알더라. 그게 유명하다보니 다른 소설들의 번역제목도 원제와는 다르게 엇비슷하게 삼았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눈뜬 자들의 도시’ 이렇게. 마치 그가 도시연작을 쓴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제2 복음’도 쓰는 등, 성경 재해석(마리아의 섹스도 나온다)도 시도했다. 

그 가운데 연작이라고 할 만한 것은 ‘눈먼 자들의 도시’에 이은 ‘눈 뜬 자들의 도시’다. 원제목에서는 그것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내용상 앞의 상황을 작가가 거론하니 그렇다. 앞부분에서는 그러지 않았지만 뒷부분에서는 소설이 소설을 떠올리면서 진행된다. 재밌는 일이다. 허구를 만들어 놓고, 그 허구에 다른 허구를 덧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하나는 갑자기 눈이 멀고, 다른 하나는 갑자기 백지투표가 벌어지고, 그 사이에는 4년이라는 간극이 있고. 

앞 허구가 뒤 허구에 나오는 것을 적어보았더니, 번역판(해냄출판사)의 쪽을 기준으로, 112쪽에 나오고, 224쪽부터는 자주 나온다(230, 239, 244, 245, 252쪽 등, 그리고 272쪽은 오직 홀로 눈이 멀지 않은 여주인공인 안과의사부인과 백지투표를 잇기에 중요하고, 그 여자는 301부터 등장해 303, 336, 387쪽 등). 재밌는 글쓰기이자, 인기유지의 비결 같았다. 
그런데 나에게 용기를 준 것은, 1922년생인 주제가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1982년이라는 점이었다. 아, 60이 넘었다! 
스포일러 좀 하자. 처음 물음의 답, ‘똥’이다. 영화에서는 차마 표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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