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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장학자를 떠나보내며
한 소장학자를 떠나보내며
  • 이상훈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3.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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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故 박윤호 경남대 교수 ©
절기로 따지자면 처서가 지나 본격적인 가을 하늘이 느껴져야 할 때인데, 요즈음은 왠지 하루걸러 질척거리며 비가 내린다. 가을 따가운 햇볕에 곡식과 과일도 여물고 인심도 드는 법인데 올해 농사는 결딴나는 것이 아닌지 수심이 밀려온다. 이렇게 마음이 어수선한 가운데 왠지 따뜻한, 그러면서도 매우 안타까운 한 동문의 마지막 행로를 기록에 남기고 싶다.

 

연구년을 맞아 눈빛을 섬광처럼 달구어 영국으로 날아간 그는 포부가 있었다. 희랍 고전 철학에 대한 한국 학계의 연구 깊이를 자신있게 그들에게 알리고, 또한 서양 사상의 장구한 전통을 정리, 발전시켜 온 영국 철학계의 중진 연구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신의 연구 결과를 국제전문지에 발표하고 싶은 의욕으로 그는 처자식을 마다하고 홀로 비행기를 탔다. 사고가 앞서 나가도 의사소통이 쉽지 않으면 어느 사회에서도 쉽사리 인정받기 어려운 법, 그 역시 언어의 난관과 또한 두텁게 다져진 영국학계의 반석을 두드리는 것이 용이치 않아 마음고생에 몸 고생까지 덧붙여 나갔다. 가정의 따스함이나 부인의 내조도 없이 끼니를 거저 아무렇게 때우면서도 한국 학자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듣건대 그는 아마도 몸부림치는 수준으로까지 자신을 달구었던 것 같다.

 

세월은 빨라 연구년으로도 자신의 목표와 의욕이 충족지 않자 사립대학에서 그 어려운 휴직까지 마다하지 않고 역경의 나날을 보낸 지 2년을 넘었다 한다. 그러던 그가 지난 여름 부인이 함께 하자마자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보다 못한 아내가 병원을 강권하다시피 찾았다가 암 말기 선고를 맞았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회한 속에 그래도 임종은 고국에서 맞아야겠다고 비행기편을 신청했지만 항공사는 죽음을 앞둔 승객을 냉정히 외면했다고 한다. 이를 보다 못한 친구들이 나서 간신히 여정을 잡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비행기에 오르기 하루 전에 이 억 만리 외지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철학계 내에서도 가족같이 작은 학회가 하나 있다. 동료라기보다 오히려 가족관계라고 해야 더 적합한 '서양고전철학회', 그 식구들이 모두 모여 침울한 표정으로 분주히 장례 절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졌다. 황급하게 모 병원 영안실에 마련한 빈소 곁에, 경황이 없는 가족과 친지들을 대신하여 조용히 그러면서도 빠른 몸놀림으로 그들은 제자이면서도 아우같고, 어떤 경우에서는 형제나 형님 같았던 한 학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수놓았다. 너무나 선비같았던 망자의 존함은 박자 윤자 호자! 그의 임종에 부쳐 한송이 꽃을 바치는 기분으로 이 글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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