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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 무지를 일깨운 판사의 에세이
학자의 무지를 일깨운 판사의 에세이
  • 교수신문
  • 승인 2019.09.0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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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사회학(1) '어떤 양형 이유'
저자 박주영 |김영사 |2019.07.26. |페이지 280

사회학을 전공하지만 사회에 대해 남들보다 잘 알고 있다고 감히 말하지는 못하겠다. 직접 경험한 사회의 폭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여태까지 학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차이를 억지로 찾자면, 예전에는 학생으로 학교에 다녔으나 이제는 가르치는 사람 자격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폭넓은 인생경험이 학자가 반드시 갖춰야 할 소양은 아니다. 학문에 열중하다보니 세상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하더라도 학자로서의 결격사유가 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학자는 그만큼 그 사람이 전공분야에 헌신한 결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사회학의 경우는 좀 특별하다. 사회학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연구대상인 사회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사회학자는 그 누구보다 사회의 속사정에 밝을수록 좋다.    

사회를 감지하는 민감한 촉수를 태생적으로 물려받은 운 좋은 사회학자도 있고,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촉수를 혼자의 힘으로 유지 개발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회학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 두 경우에 모두 해당되지 않는다. 아주 작은 사회의 변화까지 놓치지 않고 낱낱이 포착해내는 지진계를 탑재한 능력자가 아니기에 나는 세상 사람의 도움을 기꺼이 받는 편을 선택한다.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해석을 내린다. 단지 그 해석을 직업 사회학자가 사용하는 사회학적 전문용어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세상에 대한 해석이 좁은 의미의 사회학 책에만 기록되어 있지도 않다. 서점에서 사회학 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떤 사회학 전문 책 이상으로 사회에 대한 통찰이 담긴 숨겨진 책도 세상에는 많다. 이와 같은 ‘세속의 사회학’은 나처럼 사회학이 직업인 사람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다. 특히 제한된 경험의 폭 때문에 실제의 사회로부터 자꾸 멀어져 직업 사회학자로서 위기를 느낄 때 ‘세속의 사회학’은 위기탈출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사회를 이론화해서 사회에 대한 설명력을 높여주는 추상적인 사회학이론도 매력적이지만, ‘세속의 사회학’은 직업 사회학자의 영양결핍을 보완해주는 비타민이다.  

<어떤 양형 이유>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쓴 박주영은 현역 판사이다. 이 책을 굳이 장르로 분류한다면 에세이라 해야 할 것 이다. 법조인이 책을 쓰는 경우가 요즘은 아주 많아졌고, 법조인이 쓰는 책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는 일도 드물지 않기에 글쓴이가 현역 판사라는 사실은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다. 책날개에 적힌 글쓴이 소개 글을 읽고, 그저 한 때 문학청년이었고 현재는 재즈 음악을 좋아하는 현직 판사라는 인상을 받았던 것도 책을 눈 여겨 보지 않게 만들었던 원인으로 한 몫 거들었다.  

사회학자가 아닌 말 그대로 어떤 ‘세속의 사람’이 <어떤 양형 이유>를 권했다. 베스트셀러 순위를 믿기는커녕 의심하는 편이지만, 평범한 독자의 추천은 전적으로 신뢰한다. 평범한 독자는 사심이 없기에, 평범한 독자의 추천은 바로 그런 이유로 가장 신뢰할 만 하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정말 이유 있는 추천이란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책이 법조인이 쓴 그저 그런 에세이일지도 모른다는 지레짐작의 희생양이 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학교에 갇혀 있는 직업 사회학자이자 세상사에 대한 감각이 자꾸 무뎌지고 있는 사회학자인 나에게 <어떤 양형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한 꼼꼼한 기록이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도 생각났다.

세상이라는 게 일어나기를 희망하는 일로만 구성되지는 않는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일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사회학자가 캠퍼스에 머물러 있었기에 알지 못했던 냉정한 사실과 음습한 사회의 속사정이 <어떤 양형 이유>를 통해 쏟아진다. 물론 읽기 쉽지 않다. 전문적인 배경지식을 요구해서가 아니다. 직업 사회학자에 의해 통계수치와 추상적 이론으로 표현되던 사회적 삶이 구체적 인물의 인생으로 드러나기에, 책장을 넘길 때 마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져야 하는 시간이 적지 않게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깨달았다. 아직도 나는 사회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고. 사회를 잘 모르는 직업 사회학자는 그래서 <어떤 양형 이유>를 시작으로 ‘세속의 사회학’이 담긴 책을 계속 읽어가려 한다. 실제의 사회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제대로 그리고 정확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니은서점 마스터 북텐더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니은서점 마스터 북텐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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