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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에게 깨닫는 후손 사랑 (26)-물고구마
고구마에게 깨닫는 후손 사랑 (26)-물고구마
  • 교수신문
  • 승인 2019.09.05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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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26)-물고구마
정세근 교수

고구마는 밤고구마가 맛있다고 한다. 고구마가 들으면 화낼 일이다. 

내가 고구마지, 밤이냐? 나를 밤이랑 비교하다니, 인간들의 심보가 고약하다. 그래 맛있는 고구마면 그냥 맛난 고구마라 하던지, 아니면 정말로 비교할 수 없는 꿀을 붙여서 ‘꿀고구마’라고 할 것이지 별로 달지도 않은 밤이랑 나를 비교하다니. 

어쩌면 옛날 고구마가 요즘처럼 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밤의 단맛으로 고구마의 단맛을 평가하지. 요즘 고구마는 밤보다도 훨씬 단 것으로 보아 밤고구마의 뜻은 아무래도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진고구마가 아닌, 속이 꽉 찬 고구마로 말이다. 아니면 속살이 딱딱하거나 물렁물렁하지 않은 놈으로 말이다. 

밤고구마의 반대는 진고구마다. 물컹거리고 달지 않은 고구마를 가리킨다. 어려서 속이 붉은 고구마도 보았는데, 요즘은 찾아볼 수 없다. 자색(紫色)으로 불렸던 것 같다. 그놈이 달아서 아궁이용으로 환영받았다. 불로 구어 단 맛을 올렸는데, 손에 묻은 검정으로 얼굴이 시커멓게 될 때까지 화덕을 떠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말하는 물고구마는 다름 아닌 물 속 고구마다. 파란 것을 보는 재미도 있고 시간에 따라 쑥쑥 커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해서, 가끔씩 뿌리 음식을 물통에 남아 놓는다. 양파도 재밌지만, 고구마는 넝쿨이 길게 자라 볼만하다. 굳이 한다기보다, 싹이 나온 놈이 있으면 1회용 컵에 담아 키우는 것이다. 요즘엔 투명 플라스틱 컵이 난무해서 손쉽게 기를 수 있다.

물속에 넣어두었더니 고구마 줄기가 자라는 것이 눈에 띨 정도로 빨랐다. 책꽂이 아래쪽으로 서너 줄기가 치렁치렁 늘어지면서 푸른 잎을 자랑했다. 책꽂이 정원이라고 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랐다. 마른 잎은 가끔씩 떼어주면 됐다. 물주는 것도 노상 잊어버렸지만 잘 자라줬다. 물이 없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화들짝 놀라 물을 채워주었다.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아 힘차게 진도를 나갔다. 

이번 여름은 고구마와 함께 보낸 것 같다. 고구마 줄기도 무쳐 먹는데, 혹 이파리는 먹을 수 있는지? 뭐,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상추 농사지어 쌈 싸먹듯, 고구마는 비슷하게 안 될까 하면서.
그런데 여름이 가면서 고구마가 드디어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물도 꽉 차 있는데 웬일일까 싶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고구마가 거의 속이 비었다.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 고구마의 힘은 제 살에서 나왔던 것이다. 영양분이 다 떨어지자 줄기와 이파리가 더 이상 싱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먹는 고구마, 사실은 그 놈들이 먹을 것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먹는 감자도, 감자의 후손이 먹을 것이었다. 우리가 그들 대신 빼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잊고 있었다. 우리가 먹는 식물이라는 것이 모두 그들이 후손을 위해 마련해놓은 영양을 훔쳐 먹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쌀도 쌀의 아이들에게 남겨줄 것이었고, 옥수수도 옥수수의 아이들에게 남겨줄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살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있는가? 살은커녕 오직 씨앗이라도 남겨주고 있는가? 하물며 넉넉한 마음이라도 남겨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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