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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장의 개구리' 어떻게 조치하시겠습니까? ’(25)-개구리 윤리학
'샤워장의 개구리' 어떻게 조치하시겠습니까? ’(25)-개구리 윤리학
  • 교수신문
  • 승인 2019.08.3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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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25)-개구리 윤리학

아침에 운동을 나갔다가 샤워장에 개구리가 있어 짐짓 놀랐다. 귀뚜라미야 종종 보지만 웬 개구리? 샤워장 주위가 풀밭도 아니고, 그 둘레로는 실내운동시설로 둘러 쌓여있는데다가 하수구도 작아 그 크기로는 통과하지 못할 정도니, 참으로 모를 일이다. 
개구리가 연체동물 아닌 연체동물(?)이라서 좁은 하수구 덮개를 통과했나? 아니면, 풀밭에서 뛰어놀다가 물비린내가 나는 샤워실로 찾아왔나? 웅덩이 같아서, 냇물 같아서, 습기가 많아서, 냄새가 좋아서? 크기로 보아 새끼로 보이는데, 뭔가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의식이었다. 잡아서 밖에다 놓아도 이놈이 냇가까지 잘 찾아갈 것 같지도 않고(보도와 차로 때문에), 공연히 건디는 것도 이놈이 들어온 길을 못 찾게 만들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이 옳은 일인가?’ 물어보았다. 개구리 윤리학이었다. 한동안 유행하던 정의론의 부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아?’(What a right thing to do?)인 것처럼, 나는 물었다. 
결국 그대로 두기로 하고 떠나왔지만, 뒤통수가 가려웠다. 혹 방기는 아닌지, 해야 할 일을 뒷전으로 미룬 것 아닌지, 개구리의 자율성을 핑계로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닌지, 알량한 자유의지를 믿어 개구리에게는 신 같은 나의 존재가 그의 궁핍한 상황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닌지, 개구리도 큰놈이 아니라 어린놈인데 미성년자에게는 다른 기준을 들이댔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비가 오는 날 지렁이 모양으로 기어 다니는 놈도 아닌데 비가 오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그놈은 참으로 경험 없거나 핸디캡을 지닌 놈이 아니었는지? 
더 가책을 받아야 하는 것은 우리 마을이 두꺼비 마을로 불린다는 사실이다. 두꺼비가 사는 방죽을 보존하고자 주민들이 법원과 검찰청의 공사 때 매몰을 막아냈다. 그래서 이 마을 길 이름도 두꺼비길(路)이고, 마을 입구에는 두꺼비 상징물이 있으며, 신축 법원 앞에는 두꺼비 교육관도 같이 생겼다. 
개구리가 두꺼비는 아니지만 그래도 비슷한 놈인데, 나는 그놈이 두꺼비가 아니라서 존재를 열등하게 보고, 일종의 종족주의(racism)적 차별의 시각에서 그놈을 내버려 둔 것은 아닌지, 물어보아야 할 일이다. 
두꺼비 마을이 된 후로 사람들이 두꺼비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두꺼비보다 그런 미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다.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라도 같이 살려는 마음가짐이라고나 할까. 
두꺼비는 방죽에서 부화해서 최고 해발 163미터 산등성이를 넘어 산속으로 숨어든다. 몇 년 전 비오는 날, 새까만 새끼들이 능선에 붙어 까맣게 기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 작은 놈들이 어떻게 알고 그 산을 넘어가고 있을까, 정말로 신기했다. 시절이 되면, 연어처럼 다시 방죽으로 돌아와 알을 낳겠지. 발에 밟힐까 조심하며 길을 걸었다. 
두꺼비에 관심이 많다보니, 동네에서는 맹꽁이와 개구리 울음의 구별도 이야기꺼리가 된다. 비슷한 종족에 사랑을 드넓게 베풀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재밌게도, 물질적으로 가장 혜택을 본 사람들은 법원과 검찰청 사람들이다. 방죽을 메우는 것이 원안이었지만 시민들의 반대로 자연환경이 그대로 살아남게 되면서 아주 훌륭한 정원이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개구리를 냇가로 옮겨주었으면, 흥부의 제비처럼 박 씨라도 물어다주지 않았을까? 이런 대가를 바라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오늘 아침의 개구리 윤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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