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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전통 부재한 한국…대안 이념은 혁신자유주의”
“자유주의 전통 부재한 한국…대안 이념은 혁신자유주의”
  • 교수신문
  • 승인 2001.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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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석 / 유네스코 철학 석좌 교수
차인석 서울대 명예교수(철학)는 퇴임한 이후에도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지난 1980년대 말부터 한국 유네스코의 집행위원으로 참여한 이래 1993년부터 96년까지 한국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유네스코 철학 석좌교수를 지내고 있다. 지난 2월 말에는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석좌교수 학술포럼에서 ‘세계화의 도전에 직면한 지식인들’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차 교수는 이 논문에서 그가 오랫동안 대안적 이념으로 주장해온 ‘혁신자유주의(Reformed Liberalism)’의 세계적 유효성과 시민운동을 통한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주장하고 있다.

△국제적인 철학, 인문학 학술포럼에 자주 참석하고 계신데요. 최근 서구의 인문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화두는 무엇입니까.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의 위기가 논의된 지는 오래입니다만, 서구 특히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우리와 같은 의미의 인문학 위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죠. 그들에게 오랜 문화전통이 있어서겠지만, 그들의 위기는 ‘방법론적 위기’가 아닌가 합니다. 방법론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동양사상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동양은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이번 학술모임의 주제에도 ‘세계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세계화의 문제는 다원화된 문화를 파괴하고 일원화된 문화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경제적 세계화 때문에 문화의 세계화가 촉진되고 있고, 매스미디어의 발달을 통해 두 세계화의 경향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어쨌든 세계화의 자체는 불가피하게 진행되는 현상일 것입니다. 이런 흐름속에서 살아남을 문화는 살아남게 되겠지요. 중국과 같은 선진문명과 문화적 교류를 지속해왔던 우리 역사가 증명하듯이 세계화를 문화발전의 토대로 삼을 수도 있겠지요. 세계화에 대한 문화적 비판은 고유한 문화도 보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인데, 그것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는 없겠지요. 영어의 3분의 2가 라틴어에서 왔다고 해서 영어권이 라틴어권에 대해 저항을 했나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 지식인이 참여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서구 지식인들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이번 프로그램의 주제에 신자유주의가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그들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탐색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발표논문에서 신자유주의 시장원리 때문에 한국의 대학이 위기에 몰렸다, 모두 공과대학으로 변해버리고, 인문 사회대가 몰락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지요.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참여형과 분노형으로 구분하고 지식인의 참여를 말한바 있습니다. 햄릿은 행동은 사유의 그늘에서 싸늘해진다고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사르트르의 말처럼 행동하는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남미의 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유럽은 그런 고민이 없어 보입니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면서 좀 부끄러웠습니다. 영문학과에서 세익스피어를 읽지 않고, 영어회화를 한다거나 한국의 대학생들이 빅토르 위고를 더 이상 읽지 않는다는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혁신자유주의를 대안적 이념으로 내세우고 계십니다. 혁신자유주의가 개혁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습니까.
“시장원리가 지배적인 것 같지만, 월러스틴이 말한 것처럼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서로 접근해가고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에 좌파였던 사람이 보좌관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그가 내세운 개념이 바로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입니다. 전통적 보수주의와는 다른 거죠. 클린턴이나 케네디도 흑인들의 편을 들지 않았습니까. 사회주의는 공동체를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개인의 이니셔티브를 길러주는 자유주의를 필요로 합니다. 내가 말하는 혁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이니셔티브를 존중하면서 개인으로 하여금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사회적 폭을 넓혀주는 것입니다. 한국 엔지오의 논리가 바로 혁신자유주의가 아닌가 합니다.”

△어떤 측면에서 한국의 엔지오가 혁신자유주의라고 보십니까.
“자본주의를 전제하고 시장경제를 인정하지만, 정부의 개입을 통해서 평등과 갈등을 조절하려고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유럽의 ‘제3의 길’은 사회주의적 전망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이와 다릅니다. 서구처럼 자유주의의 전통이 있었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의 전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런 전통이 없는 우리에게 사회주의는 대안이 아닙니다. 소련이 몰락한 이유가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소련은 예전부터 공동체적 전통이 강했고,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은 맑스에 반하는 혁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련의 붕괴는 맑스주의가 아닌, 맑스레닌주의의 실패지요.”

△이번 발표문에서 IMF가 혁신자유주의의 이념속에서 출발했다고 말씀하고 계신데요.
“IMF나 세계은행은 2차대전 종전후 빈국에 대한 지원을 위해 출범한 기구지요. 이것은 혁신자유주의적인, 혹은 사회민주주의적인 이념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원래의 이념이 신자유주의인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그 뒤에 채무변제를 강요한다거나 미국식 자본주의의 첨병이 되고 있지요. IMF에서 사회안전망을 강조하는 것은 원래의 이념이 조금은 남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혁신자유주의는 국가나 민족단위가 아니라, 세계적 수준의 이념이어야 합니다.”

△최근 대학의 변화와 국내 학계의 풍토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대학에 영어와 컴퓨터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컴퓨터나 영어는 어디까지나 학문의 도구지, 목적은 아닙니다. 지금은 수단이 목적을 패배시키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영어를 도구로서 가르치는 것이 대학의 본래 목적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국내에서 명문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외국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늘 느끼는 바지만, 그들은 명문이라는 점을 전혀 중시하지 않는다. 그저 한 명의 학자로서의 견해를 경청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떤 논문을 발표하는지가 중요한 거지요.”

△한국철학계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아직까지 훈고학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80년대에는 현실과의 관련속에서 학문적 고민을 했지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지금은 그러한 사회비판적인 철학은 쇠퇴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현실속에서 탐구되어야 합니다. 프랑스에서 만난 한 젊은이는 아직도 맑스를 읽고 있더군요. 프랑스같은 학문 전통이 있는 나라에서도 맑스를 보고 있는데, 우리는 맑스는 끝났다고 책을 덮으니 참으로 천박한 풍토지요.”

차 교수는 ‘사회인식론’(1987년) ‘사회의 철학’(1993년)에 이어 ‘사회존재론’이라는 제목의 책을 구상했다가 사이버시대가 도래하면서 공부의 방향을 ‘기술의 사회철학’으로 바꾸었다. 차 교수는 “맑스가 착취에 의한 인간소외를 말했다면, 프랑크푸르트학파는 기술에 의한 인간소외를 말한 바 있다. 사이버 시대의 인간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내게 남은 철학적 과제이다”라고 말했다.

대담 : 김재환 편집차장

□약력 : 1933년 전남 목표 生. 서울대 철학과. 68년 서독 프라이부르크대 철학박사. 77년부터 98년까지 서울대 철학과 교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한국철학회 회장 역임. 현재는 유네스코 철학석좌 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저서로는 『사회인식론』, 『사회의 철학』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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