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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24)-술병 색깔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24)-술병 색깔
  • 교수신문
  • 승인 2019.08.23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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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껍질도 바꿔봐야하지 않을까?

참으로 웃긴다. 술병 색깔을 말하다니. 그러나 느낌이 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 느낌이 웃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요즘 소주병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도수는 여전히 낮은데, 병 모양이 마치 옛날 소주병을 닮았다. 예전에는 제작 능력도 안 되고 미적 수준도 안 돼서 소주병이 맑은 병이었는데, 요즘 소주병이 다시 투명해지고 있다. 

나도 그 병 모양에 반해, 향수에 취해, 병이 맑으니 나도 맑아질 것 같아, 그저 시원해보여, 술잔을 쫙쫙 끼얹질 수 있을 것 같아, 옛 소주병 모양의 맑은 병을 들이켜 보았다. 더운 날 몸을 찬물로 끼얹듯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도수가 엄청 낮은 것은 아니라서 병 모양에 반해 마음껏 마시다간 다음날 고생한다. 처음 그 병을 본 날 나도 과음을 하고 말았다. 과거 언젠가 소주병이 녹색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맑아지고 있다. 왜 그럴까, 엉뚱하게 물어본다. 

술은 이제 담배처럼 혐오식품이 되어가는 것 같다. 술로 가난과 독재를 달래던 시절이 지나갔나보다. 배고파서 마시고, 울화가 터져서 마시고, 사는 꼴이 엉망이라서 마시던 그 술이 이제는 아니다. 벗하기 위해 피던, 군대에서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서 피던 담배가 이제는 마약으로 분류되듯 술도 예전처럼 환영받지는 못하는 것 같다.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말이다. 이른바 ‘오피셜리’하게는 말이다. 

젊은 시절 담배는 어떤 동질감을 나누는 도구였다. 모르는 이에게도 담배 한 대 빌립시다, 불 빌립시다가 어색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사람을 만나면 누구에게나 담배를 권하고(참, 여자는 빠진다) 함께 피어대면서 사교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디서도 재떨이조차 보기 어렵다. 

내방에 아직도 재떨이가 있지만 최후에 사용을 한 지 몇 년은 지난 것 같다. 직후, 사람들에게 참으라 했고, 지금은 건물자체가 금연으로 되어있어 방에서 피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다. 고물(古物)이 되었다. 

‘소주처럼 맑게 살겠다’면서 젊은 혈기에 북 바쳐 오르는 이상을 씹고 또 씹었다. 소주 마시면 흐려지지 맑아지나, 맑게 살려면 소주를 마시지 말아야지, 맑은 것은 물이지 술인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맑은 소주가 내 영혼의 맑은 부분을 알코올로 조금이라도 지켜주길 바랬다. 그러나 술은 이제 담배처럼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다. 

음주운전 단속도 그렇다. 아침의 심사(心事)는 결코 저녁과 같지 않아, 그리고 잠이라도 몇 시간 잤으면, 그가 취중이라는 단언을 내리기 어렵다. 마음가짐이 다르고, 세상에 대한 태도가 다르고, 무엇보다도 자기에 대한 신중함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녁은 몽롱해지고자 하는 시간이고, 아침은 깨어나고자 하는 시간인데도 오직 남아있는 술 냄새로 단속을 하니 애주가들은 무방비일 수밖에 없다. 흩어진 몸가짐에서 벗어나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아침인데도 술이 덜 깼다는 이유만으로 저녁과 같이 여긴다는 것은 술꾼으로서 참 억울한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술장사들은 술에 맑은, 밝은 분위기를 집어넣어 매상을 올리고자 하는 것 같다. 권위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이제는 상큼하고 발랄하게 술병과 레벨을 장식한다. 

내가 좋아하는 싱글 몰트 위스키가 삼각형 병모양은 바꾸지 않았지만, 모든 장식을 파스텔 톤으로 꾸몄기에 하는 이야기다. 그걸 마시면 나도 화사해질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술병도 바뀌는데, 내 껍질도-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이라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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