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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애로 교감하는 ‘한일 시민연대’가 답이다
인류애로 교감하는 ‘한일 시민연대’가 답이다
  • 교수신문
  • 승인 2019.08.2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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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최재목 교수의 한일 갈등 현안 진단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한일 간의 불편한 정치외교적 관계를 두고, 지난 번 [최재목의 무덤기행: ‘가네코 후미코 편’]을 마무리하면서 나눈 대담(2019.05.13 자)처럼, 평소 자연・자유・자치의 3자(自) 사상을 실천하며 생활하는 아나키스트 박홍규 명예교수(영남대・교양학부)와 최재목교수(영남대・철학과)가 다시 대담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일시: 2019년 8월 16일(금) 오후 2:00-4:00

장소: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13층 세미나실 및 주변

최재목(이하 최): 안녕하세요? 선생님, 여전하십니다. 그동안 잘 계셨는지요? 

박홍규(이하 박): 예, 그냥 그렇게 지냅니다만, 요즘 뉴스를 보면 맘이 편치 않습니다.

최: 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러 연락을 주셔서 최근 불편한 한일 관계에 대해 <교수신문> 지면을 할애하여 이야기를 좀 나눠봤으면 하셨는데, 무슨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박: 최근 저는 여러 교수들을 만나서 한일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상당수가 일본 측 주장과 거의 같아 대단히 놀랐습니다. 대체로 청구권문제는 1965년의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었고, 따라서 작년에 대법원에서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한 것은 잘못이고 이를 거부하는 일본측의 주장이 옳고, 그럼에도 일본 측 주장을 거부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는 잘못이고, 따라서 일본 측의 수출규제는 당연한 조치이고, 경제적 약자인 한국은 일본을 이길 수 없으므로 하루속히 한국정부가 배상을 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옳고, 그래야 일본 측 수출규제가 풀려 우리 경제가 산다는 주장입니다. 그 주장의 전제에는 일본 정부가 옳고 한국 정부가 그르다, 즉 아베가 옳고 문재인이 그르다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만난 교수들이 대부분 대구 경북의 대학에 근무하거나 근무한 사람들 일부이고, 타 지역 교수들을 만나보지 못해 위 주장을 한국 교수들 다수의 주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교수들이 상당수 있다고 여겨져, <교수신문>에 우리들의 의견을 발표하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최: 잘 하셨습니다. 저도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곤 합니다만, 현재의 한일관계 문제에 대해 단순히 정치적 프레임으로 편이 갈라져 잘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지 말고 문제의 팩트 그 자체에 대해 명확히 알고, 대처 방법을 냉정하게 따져보는 게 우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근 한일 간에 벌어지고 있는 이런 저런 건의 문제에 대해 전문적으로 논의할 처지는 아닙니다만, 시민의 한 사람으로 편하게 말씀을 나눴으면 합니다. 한 마디 더 보탠다면 일본에 대해 이야기할 약간의 자격은 있지 않나 생각도 합니다만. 

박: 그렇습니다. 그럼 제 생각에는 우선 우리 두 사람이 모두 한일 간의 여러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전문적으로 논의할만한 전공자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이 대담은 어디까지나 시민적 상식 수준의 논의임을 분명히 해두어야겠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교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우리 두 사람은 일본에서 공부를 했고 그 후 지금까지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으므로 그렇지 않은 분들보다는 할 이야기가 좀 더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얘기부터 하자면 저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오사카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그 뒤 몇 차례 오사카대학 등에서 한국법 강의를 했고, 일본의 노동법 학자들과 한국의 노동법학자들이 매년 세미나를 여는 한일노동법포럼의 한국측 대표로 수년간 활동해왔습니다. 그래서 1983년부터 거의 매년, 몇 번씩 일본을 다녀왔는데 저에게 일본은 한국에 비해 거의 변화가 없는 나라라는 인상이 있습니다. 단적으로 그동안 물가가 거의 일정하고, 오사카를 비롯한 도시의 모습도 거의 변하지 않아 40년 전에 살았던 집이나 동네가 지금도 그대로인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최교수님은 어떠신가요? 일본 생활과 일본 인상을 말씀해 주세요. 

최: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저도 일본에 유학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대학원을 다니던 도중 1985년도 가을, 츠쿠바대학 대학원에 유학하여 1991년 3월에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동양철학 관련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객원연구원이나 세미나 차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이 때는 일반 생활인이나 지식인의 자격으로 일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한국 일본사상사학회 회장을 맡기도 하고 일본학 관련 학회에서 활동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 때는 주로 연구자의 시선으로 일본을 생각하였습니다. 이어서 2012년부터 현재까지 독도연구소장을 맡아오고 있는데요, 영토/영유권이나 정치외교라는 입장에서 일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전문가는 아니지만 한일 간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약간의 자격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일본을 많이 지켜봐 왔지만, 선생님의 생각처럼, 한국의 변화에 비해 일본은 참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마 그것은 외관적 풍경만 그런 것이 아니겠죠?  

박: 저는 특히 일본의 정치가 거의 불변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자민당 일색인 것입니다. 1993년과 2009년에 잠시 집권을 하지 못한 적이 있지만 자민당 장기집권이 1955년 창당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왔습니다. 자민당은 원래 보수정당이지만 2006년 아베 신조가 수상이 되고부터 극우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아베는 대북강경론으로 인기를 끌어 수상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최근 한국과 미국정부가 북한과 평화를 모색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자 대한반도 강경론으로 선회하여 인기를 계속 유지하고자 대한국 수출 규제까지 했습니다. 2013년에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뒤 올해도 더 이상 그곳에 가지는 않았지만, 이는 한국과 중국의 눈치보기 탓이고 일본 전범을 모신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베가 극우인 이유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소위 평화헌법을 부정하고 개헌을 해서 일본을 전쟁하는 나라로 바꾸고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미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승격하여 그런 준비를 해왔습니다. 야스쿠니 대신 그는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묘를 찾았는데 태평양전쟁 당시 도조 히데키 내각의 각료였던 그는 A급 전범 용의자였으나 기소되지 않고 석방돼 1957~1960년 총리를 지냈으니 야스쿠니에 버금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어 아버지의 묘소도 찾았는데 거기에서 “드디어 국회에서 개헌 논의를 추진해야 할 때가 왔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에 놀란 것은 아베나 일본 정부가 극우보수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교수들이 많다고 하는 점입니다. 아베는 “침략의 정의(定義)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하며 침략 자체를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뉴라이트 같은 역사관을 가지고 교육기본법도 개정을 했습니다. 그런 아베를 극우커녕 보수로도 보지 않고 일본에서 인기가 많다는 이유로 우리도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 교수가 많은데 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최: 저는 우선 일본이 후쿠시마 이후에 재해(災害)에 의해 ‘끝장난 나라’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재앙의 영향은 일본만이 아니고 인접국으로, 차츰 전세계적으로 확대되겠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아베정권처럼, 극우들처럼, 일본 내부의 숙명적인 문제나 불안, 불만의 에너지를 해소시켜는 방식을, 과거의 조선 침략에서 보듯이, 끊임없이 국민들의 눈을 ‘그들 자신=내부’로가 아니라 ‘바깥’으로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달리는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페달을 밟고 나아가야 하는 것처럼, 과거에는 조선으로, 현재는 한국으로, 아시아로 침략의 핸들을 돌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극우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합리화하고, 감추고, 거짓말하면서 일본 국민들의 불만, 불안을 배출하는 하수구(=적)를 늘 그들의 바깥쪽에다 만들어두고, 거기에다 온갖 그들 내면의 쓰레기, 심층심리를 버리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편한, 그리고 가장 고전적인 통치의 방식이 아닐까요? 극우보수들은 메이지 일본으로 돌아가 그들이 누려왔던 제국주의 일본을 재건하고 싶겠죠. 다시 조선에서 아시아에서 그들의 언어, 역사를 국어, 국사로 가르치고 싶겠죠. 아베를 위시한 극우정치인들을 보면 히틀러나 아돌프 아이히만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극우들은 그래봤자, 겨우 2류, 막가면 3류로 떨어지겠죠. 끊임없이 국격을 잃어버리고 나면, 결국 일본은 국가 자체의 품격이, 그들 자신의 손에 의해 할복자살하는 꼴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베 정권은 자꾸 거짓말하고 딴청을 피울 게 아니라 잘못한 것에 대해, 진정으로 참회하고, 머리 숙여 제대로 사죄하는 것, 그리고 배상하고 보상하는 일이겠죠. 배상, 보상은 최소한이고 참회, 사죄가 최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법이 도덕의 최소한이듯 말입니다. 일제의 강제징용 피해에 대한 배상의 문제는 법적인 면, 금전적인 면도 중요하겠지만 그 이전에 도덕적, 가치적, 심리적인 접근도 놓쳐서 안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도 그런 ‘법적-금전적’ vs ‘도덕적-가치적-심리적’ 영역이 겹쳐있기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느 정도 지성을 갖추었다면 이런 겹친 면들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폭력으로 타인이 다쳤거나 죽었을 경우 보험처리만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박: 저는 2000년 5월 1일에 부산지법에 제소해 시작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등 6명의 미쓰비시 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소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측 대리인으로 참석하여 국제법, 특히 ILO 강제노동철폐조약 등을 근거로 삼아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판사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들의 손해배상도 인정해야 하느냐 라는 식으로 답변한 점에서도 짐작했듯이 2006년에 1심, 2009년에 2심에서 모두 패소했습니다. 그러나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에서 원고 패소한 고등법원의 2심을 파기, 환송하는 승소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는 일본 법원에 제기한 소송이 2001년 3월 27일 청구기각 판결을, 2003년 10월 9일 최고재판소에서 패소 판결을 각각 받은 것을 뒤집은 것이지만 일본 최고재도 개인적 청구권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므로 동일한 취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은 2018년 10월 30일,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닌 점 등에 비추어, 원고들이 주장하는 신일철주금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하여 원고승소 판결하였습니다. 이 판결은 청구권협정이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고, 청구권협정 제1조에 따라 일본 정부가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이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에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으며, 일본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고, 이에 한일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대한민국이 요구한 12억 2000만 달러에 미치지 못하는 3억 달러만 받은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도 적용대상에 포함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이나 그것에 동의하는 한국 측 일부 의견은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은 청구권협정상 청구권의 대상에 ‘피징용 청구권’도 포함하고 있고, 피징용 청구권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까지도 포함한 것이고, 청구권협정 제1조에서 정한 경제협력자금은 제2조에서 정한 권리관계의 해결에 대한 대가 내지 보상으로서의 성질을 포함하고 있으며, 양국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배상’도 당연히 청구권협정의 대상에 포함하는 것으로 상호 인식하고 있었고, 대한민국은 청구권협정에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포함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여, 이후 장기간 그에 따른 보상 등 후속 조치를 취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왔습니다. 저는 2000년 이래 대법원 판례의 근거가 된 견해를 주장해왔는데, 우리 교수들의 상당수가 그것을 부정해 놀랐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징용의 강제성을 부정하고 징용이 한국 청년들의 ‘로망’이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최 교수님의 견해는 어떠신지요? 

최: 디테일에 대한 것은 전문가이신 박 교수님의 의견에 일단 맡기겠습니다. 다만 저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기본적으로 배상, 보상은 최소한이고 참회, 사죄가 최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법적-금전적인 것은 최소이고 도덕적-가치적-심리적인 것이 최대라고 봅니다. 법에 심급(審級)이 있다면 도덕적-가치적-심리적인 것에도 심급이 존재하며, 전자보다 후자의 합의 과정이 더 어렵고 심층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판결이나 협정의 결과에 따르는 것은 ‘절차적 판단’에 동의하는 것이지만, 판단을 다시 판단하는 이른바 ‘판단의 판단’의 여지, 후속 조치의 여지는 열려 있다고 봅니다. 과거 국가적 차원의 협약, 협정이나 판단에서 누락되거나 부당하거나 편파적인 것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할 것이고, 얼렁뚱땅 넘어간 것이라면 당연히 제대로 되짚어 봐야하겠죠. 규정상 ‘이미 모든 것은 끝났다!’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의제기할 것이 있다면 개개인을 대신하여 당당하게 주권을 대행하는 것이 국가가 할 역할 아닌가요? 지금 이 대목에서 복잡한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만일 한일 간에 풀 수 없다면, 국제적인 공정한 제 3자의 조정이라는 점도 논의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징용의 강제성을 부정하고 징용이 한국 청년들의 로망이었다’는 식의 주장은 글쎄요? 예컨대 지옥에서 악마들이 경영하는 농장에 끌려가 두들겨 맞아가며 숨죽이며 양을 키우던 청년 A씨가 고향에 부칠 돈을 벌었고, 치즈를 몇 조각씩 먹을 수 있었고, 양떼가 노니는 푸른 언덕을 쳐다보며 가끔 즐거워하였고, 고향 친구에게 나중에 “나는 다시 이곳에 오고 싶어할거같아!” 라며 편지를 썼다고 치자. 누군가 이 전체의 틀은 보지 않고, 편지로 남아있는 언어적 수사나 그것을 통계 낸 수치에 골몰하여 “그때 그런 청년들은 행복했다, 로망의 인물들이었다”고 말한다면 저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수치나 통계가 속인 그 너머의 가치적 측면이나 참혹한 인간적 조건은 과연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박: 설령 강제동원에 대한 손해배상은 협정 규정상 인정할 수 없다고 해도, 규정되지 않은 위안부의 손해배상은 인정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2001년 일본의 국제 인권 변호사가 국제 인권 옹호자의 입장에서 기술한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기록을 편역한 <위안부가 아니라 성노예이다>라는 책에서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징용과 마찬가지로 위안부도 강제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근거자료가 없다는 이유에서인데, 근거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님에도 그렇게 주장되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근거 자료가 부족한 것이 당연한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설령 징용이나 위안부 일부가 자발적이었다고 해도 침략전쟁을 일으켜 조선인을 그런 식으로 비인간적인 노동과 성노예적 행위에 종사시켰다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최: 기본적으로 박 교수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 문제는 파편적인 기록이나 통계로 바라보는 사회과학적인 판단, 해석의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저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법적인 것은 최소이고 도덕적-가치적-심리적인 것이 최대라고 봅니다. 그리고 식민지 공간이라는 특수상황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사태가 평면적이어서 비인간적 사건이 입체화 되질 않습니다. 보다 지성적인 안목에서 문제를 고려하고자 노력한다면, 일본에서건 한국 내부에서건, 천박하지 않게 표현하지 않고 품격 있게 구사할 언어가 떠오를 것이고, 두 번 세 번 상처 입히지 않고서 과거를 치유할 적절한 법적 형식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식민지근대화론은 종래 학설의 하나로 제시되어 오다가 몇 년 전의 국정교과서 문제와 얽히고 다시 특정 정당의 입장과 결부되면서 하나의 정치적 근본주의의 강령이 된 듯한 느낌이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은 전근대 조선사회를 비판하면서, 아울러 조선을 근대니 근세니 그 맹아니 하며 미화하는 학설을 비판하면서 식민지시대에 와서 비로소 근대가 시작되었고, 근대화의 목표는 자유민주주의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에 철도나 학교나 병원 같은 근대적 시설이나 사법이나 공장이나 군사와 같은 제도가 일본의 통치를 위한 것이면서도 자본주의의 기초를 낳았다고 해도 그것이 조선이라는 전제사회에 반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였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습니다. 가령 일제의 민형법 같은 근대법제의 조선 적용은 조선 통치의 효율성과 함께 일본인들의 경제활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35년간 일제에 대항해 민족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럼에도 식민지근대화론은 독립투사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가치를 인정하기커녕 그 중심이었던 임시정부의 존재조차 부정하며 이승만 중심의 1948년 8월 15일의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보아야 하며 그것을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며 1945년의 광복을 부정합니다. 그들이 건국이란 것은 국제적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식민지시대에 민족독립을 위해 싸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투쟁의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를 찬양하고 그들의 정치노선, 특히 박정희의 재벌 중심 경제발전론을 미래 한국의 비전으로 제시하는 것도 식민지근대화론의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맞지 않습니다. 여하튼 식민지근대화론이 하나의 학설로서는 전적으로 무의미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주장자들이 국정교과서 문제와 결부되면서 그들 자신이 주장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존 역사 교과서가 민족사관과 민중사관에 근거하고 있다고 맹렬
히 비판하며 국정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과 모순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사태의 본질은 자유사관과 민중사관의 투쟁이다. 우리의 역사를 해석할 권병을 누가 장악하는가라는 절체절명의 이념전쟁이다. 마성화된 민족주의 권력으로부터 우리의 자유이성을 해방하는 종교전쟁이기도 하다"라는 식의 구절에서는 광신적 근본주의까지 나타납니다. 식민지근대화론자 일부가 독실한 기독교신자이고 영어공용화 주장자인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최: 박 교수님 말씀에 기본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저는 그냥 여기서 한 두 마디만 더 보태겠습니다. 우선 저는 ‘근대’는 어느 특정한 사회나 국가가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역사적 보편이라 봅니다. 다시 말하면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었더라도 내부적 요인이든 외부적 요인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조선은 그 나름의 특성을 가진 근대라는 길로 필연적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근대라는 시대의 추세가 철로를 놓고 공장을 세우고 하였지, 꼭 일본만이 그렇게 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아울러 ‘일본이 식민지를 했기에 한국이 근대화되었다’는 논법에 대해서도 저는 이렇게 되물 수 있습니다. “정말 조선을 근대화하기 위해서 식민 통치를 하였다고?” 당연히 아니겠죠. 근대화란 자신들의 야욕을 성취하기 위한 부수적인 사업이었죠. 비유하자면 어떤 부모가 아이를 때리면서 “너를 잘 되게 하기위해서 때렸고, 그 만큼 때렸으니 이 만큼 네가 성장했잖냐?”라고 한다면 그 아이가 식견이 있다면 이렇게 대꾸할 것입니다. “안 때려도 성장했고, 안 맞았어도 잘 컸거든요?”라고. 그 아이를 그 아이대로 두면 스스로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 논의는, 논의 자체로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현실의 이념과 정치논리와 결합했을 때, 그 다음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다음 세대가 어떻게 살아갈 것을 권유할 것인가를 곰곰이 고민하게 합니다.    

박: 마지막으로 현 상황의 타개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 대안입니다. 저는 문제의 본질은 평화이고 그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 즉 시민이라고 봅니다. 그것도 정부에 의한 시민 연대가 아니라(김영삼 정부 때 청소년연대 사업을 하려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지요) 시민에 의한 시민 연대에 의한 평화 추구라고 봅니다. 그 점에서 최교수께서 최근 관심을 가지신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사랑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아울러 종래의 이분법인 ‘애국이냐 이적이냐’가 아니라, 또 일본인 전체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일본 아베 신조 정권 등 극우 세력에 대한 적대로 국한하고 그렇지 않은 일본 시민과의 연대를 중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최: 예, 맞습니다. 한일관계 개선이나 반일 정서를 선순환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바람직한 대안을 생각해야 합니다. 실천 없는 이론은 허망하죠. 기본적으로 한일 간의 대립은 파괴적으로 가서는 안 되고, 차츰 발전적으로 진전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에서는 극우보수의 아베, 아베정권과 일본인 일반을 분별하는 시야와 어법, 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한국을 무시하고 적으로 간주하는 아베정권입니다. 일본의 극우보수 세력입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노력하겠지만, 민간은 민간대로 인간애, 인류애를 가르치고, 건전한 시민끼리 연대하여 공동대응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참혹했던 시기에도 가네코 후미코 같은 여성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박열과 함께 했습니다. 일제 권력의 온상인 천황제를 말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다가 죽어갔습니다. 그 외에도 일제강점기에, 그리고 군부독재기에, 많은 양심적 진보적 일본인들이 조선인, 한국인들과 공동으로 전선을 구축하거나 연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좋은, 건전한, 인간애를 동반한 기억을 소중히 하며, 미래세대를 교육하고, 연대해 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박 교수님 말씀하셨듯이 결국은 ‘평화’라는 보편 가지를 향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고, 그런 시민연대로서 교류하며, 그 숫자를 계속 늘리는 일이 소중할 것입니다. 오히려 정치를 시민연대가 이끌어가고 만들어 낼 수 있을 때까지 실천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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