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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필로소피쿠스'
'호모 필로소피쿠스'
  • 도정일 논설위원
  • 승인 2003.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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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어느새 가을학기 개강이다. 어제까지 여름이었는데 어째서 벌써 가을인가. 대부분의 교수들에게 여름은 연구, 조사 여행, 집필의 시간이다. 그러나 여름이 끝났을 때 교수들이 되돌아보는 여름은 거의 언제나 ‘절반의 여름’이기조차 어렵다. 당초에 잡았던 연구, 조사, 집필 계획의 성과가 흔히 절반의 타작에도 못 미치기 때문이다. 가을 강의 준비는 충분한가. 여름은 강의 준비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여름이 여러 모로 불만의 여름일 때, 교수의 가을학기는 불가피하게도 불만으로 시작된다.

이런 불만을 다스릴 방법이 없을까.  ‘정론’ 칼럼에 개인적 이야기를 써도 되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지난 몇 년간 나는 이런 종류의 불만에 대비하기 위해 내가 맡는 모든 학부 강의를 밑바닥에서 지배하는 '기본 질문' 몇 가지를 준비해놓고 있다.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이며 그런 사회는 가능한가?”,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이며 그런 삶은 가능한가?”, “인간적 善이란 무엇이며 그런 선이 있는가?” 감히 말하건대 나는 적어도 학부 강의, 특히 그것이 교양과목 일 경우에는 이런 종류의 ‘기본질문’들이 배경에 깔려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대학 강의실에서 이런 질문들은 이미 거의 소멸했거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대학 교육이 어떤 경우에도 생략할 수 없는 것이 ‘기본 질문’이다.  

우리가 학생들을 길러서 내보낸다는 그 ‘사회’는 오늘날 어떤 ‘사회’인가. 시장원리주의의 세계에서 ‘사회’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이해관계만 중요해지는 현실 세계에서 국가는 사회를 조직, 운영, 통합할 무슨 규범과 방법을 가질 수 있는가? 그런 세계에서 개인들이 머리에 담고 다닐 ‘좋은 사회’의 그림은 가능한가? 학문적으로도, ‘사회’에 대한 현대적 사유, 이론, 방법론은 극히 문제적인 극단적 허무주의를 담고 있다. 현대 인문사회과학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 탈근대론적 사유에서 사회는 결코 ‘선의 세력’이 아니다. 사회가 선의 세력일 수 없다면 ‘사회인’을 교육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 수 있는가? 탈근대론적 관점에서 보면 ‘좋은 사회’란  ‘좋음’에 대한 어떤 객관적 기준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개념이다. 객관성, 진리와 진실, 선, 이런 것들은 오늘날 학문세계의 지배적 담론양식에서는 폐기 선고된 지 오래다. 그러나 현실의 압력과 유행 사조에 휘말려 ‘좋은 삶’과 ‘인간적 선’에 대한 사유가 대학 교육에서 마비되고 배제되어도 되는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기본적 질문을 상기한다는 것은 ‘소피아’와 ‘소피아에 대한 사랑’을 되찾는 일이다. 이 가을 우리가 대학 강의에서 할 일의 하나는 ‘호모 필로소피쿠스의 회복’이다.

도정일 논설위원·경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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