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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획 : 국내 개념사 연구의 현황과 수준
학술기획 : 국내 개념사 연구의 현황과 수준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9.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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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동서 사상의 대회"...정치학쪽 성과 쏠쏠

최근 정용화 연세대 교수는 국내 한 일간지에 글을 기고했다가 기분 나쁜 일을 당했다. 원고 중에 '自主'라는 표현을 빼자고 연락이 온 것이다. 그 좋은 말을 왜 빼냐고 하니, 북한에서 즐겨 쓰는 말이고 요즘엔 반미와 곧바로 연결이 되니 오해를 부를 수 있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에서 쓰이는 용어들은 위에서 보듯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거기엔 역사와 정치의 기억들, 주체들의 욕망이 개입돼 있다.

이러한 용어, 개념들의 역사를 추적해 그것의 기원을 바로 보고, 역사적 변천과정을 제대로 인식하려는 연구경향이 국내에 자리잡고 있다. 바로 사회과학에서의 개념사(Conceptual History) 연구가 그것이다. 서구는 물론, 가까운 일본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불과 10년 정도의 연구사를 기록중이다.

국내에서 개념사 연구를 처음으로 본격화시킨 학문영역은 정치학이다. 10년 전 하영선 서울대 교수(외교학과)를 중심으로 근대 시기 정치텍스트로 한성순보 등 신문읽기 모임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파연구회'라는 꽤 인기 있는 학자들의 모임으로 자라났다. 여기선 자유, 민주, 개인, 사랑 등의 근대적 수입용어들이 어떤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 수용되고 사용돼 왔는지에 대한 발표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결과가 서남동양학술총서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사회학 분야에서도 박명규 서울대 교수가 '사회'(Society)라는 개념의 수용사를 논문으로 다룬 바 있지만, '전파연구회'를 먼저 언급한 것은 이 쪽에서 이 분야 전공자들이 무수히 배출되기 시작한 까닭이다. 김영호(부국강병), 장인성(세력균형), 하영선(문명), 김석근(개인), 김용직(민주주의), 최정운(사랑) 등 많은 연구자들의 본격 결과물을 생산해내고 그 후속세대까지 길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코젤렉의 '개념사전' 모델로 삼아

이들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독일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작업을 모델로 삼고 있다. 코젤렉은 1백여개가 넘는 개념들의 역사적 변천을 설명한 개념사전을 펴낸 바 있다. 모임을 이끈 하 교수는 "처음엔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독일과는 또 달라, 이중 삼중의 과정을 거쳐 개념이 들어오니 그 경로를 추적하는 게 훨씬 복잡하고 연구하기도 힘들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동아시아 개념 수용의 경로를 이론적으로 탐색한 리디아 류 버클리대 교수의 저서 '통언어적 실천'(Translingual Practice)가 캐논처럼 참고되고 있는 책이다. 최근엔 와세다대에 있는 대표적인 개념사 연구자 집단인 시라노 교수팀과 교류도 하고 있다.

특히 정치사상 분야는 개념에 민감하다. 한국정치사상학회도 3년 전부터 이쪽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00년 6월에 동서양 정치사상에서 '권력'의 개념을 주제로 10편의 논문을 받아 학술대회를 열었는데, 시기적으로 넓게 걸치다보니 깊이있는 얘기가 나오지 않아 그 다음부터는 근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01년에는 일본정치사상학회와 공동으로 한일 자유 개념 수용에 대한 연구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김병곤 총무는 "개념사 연구의 궁극적 목표는 동서양 사상간의 대화"라고 말한다. 근대에 주목하는 것도 이 시기에 동양과 서양이 구체적으로 만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유생들이 자유, 권력 개념이 들어왔을 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고민했을까 라는 것이다.

정용화 연세대 교수, 이종은 국민대 교수, 강정인 서강대 교수, 김주성 한국교원대 교수 등이 이런 문제의식으로 연구중인 멤버들이다. '자유'를 연구한 정용화 교수는 리버티(liberty)가 자유로 번역되지 않고 자주로 번역된 사연에 대해 천착했다. "동양고전을 보면 자유라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라는 의미로 쓰이거든요. 그래서 자유 대신 책임 논리를 강조하기 위해 자주라는 번역어를 선택한 것이죠. 서구에서 자유가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보호라는 관념이 강한 것과는 완연히 그 성립과 쓰임새가 다른 것이죠"라고 그는 말한다.

학문분야에 따라 강조점 약간씩 달라

사회과학의 개념사 연구는 국문학 등 인문학에서의 개념사 연구와 만난다. 국문학에서 '문학이라는 譯語'라는 논문을 발표한 황종연 동국대 교수라든지, '문명, 문화 관념의 형성과 국문학의 발생'이라는 류준필 성균관대 교수의 연구도 개념사에 속한다. 다만 문학에서의 개념사는 어원학에서 자라나와 사회과학적 방법론과 결합된 양상이라 아무래도 이데올로기적 컨텍스트가 좀 약한 편이라는 게 학자들의 구분법이다.

철학에서는 강영안 서강대 교수가 선봉에 선 학자다. 1930년대 이후 한국 철학자들이 근대, 이성, 주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하고 정착시켰는지를 분석한 '우리에게 철학이란 무엇인가'(궁리 刊)가 그것이다. "만일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용어들인 의식, 정서, 시간, 사고, 이상, 개인, 인권, 정의 등을 총독부 건물처럼 일시에 철거한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그의 문제제기는 섬뜩할 정도다. 우리사상연구소가 펴낸 '우리말 철학사전'(지식산업사 刊)도 역사적 논의에 주력하는 건 아니지만 철학용어들의 한국적, 현실적 쓰임새를 분석해서 그 의미들을 성찰해보는 작업이다.

사회학에서 개념사 연구는 더욱 초보단계다. 주로 사회사, 사상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근대성의 역사적 구조를 탐색하면서 개념사 연구와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로 '사회'(society)의 개념을 추적한 박명규 서울대 교수가 있고, 올해부터 대학원에서 개념사 강의를 하면서 연구에 본격 착수할 예정인 김경일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그리고 정근식 서울대 교수 등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연구성과가 나와있지는 않지만, 정치학과의 퍼스펙티브 차이는 비교적 명확하다. 정치학적 개념사 연구의 접근방법은 주로 국제간의 개념사용 및 통용에 있어서의 차이에 동기가 있고 관심이 주로 외부로 뻗어나간다면, 사회학에서는 좀더 내재적인 차원에서 용어의 수용과 정착, 그것이 근대성의 한 부분을 어떻게 이루고 있는지를 탐색한다.

 
개념사 연구는 우리 학문을 위한 기초적이면서도 필수적인 연구다.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나라들의 '학문적 얼굴'이 바로 개념사 연구라고 이 분야 연구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 만큼 자신이 쓰는 용어와 개념에 대한 주체적인 역사를 구성하는 일은 중요하다. 현재 정치학을 중심으로 국문학, 철학, 사회학 분야에서 개념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개념사 연구는 학제적 성격이 강한 연구다. 국문학적 연구가 정치학에서 연구의 기초적인 자료로 쓰일 수 있고, 정치학에서의 성과물이 사회학적 관점에서 검토를 받는 식으로 시스템을 만들어나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학자들은 강조한다.

최근 학술진흥재단이 지원하는 한국근현대연구에서 개념사 연구가 눈에 띄고 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진덕규 이화여대 교수(정치학)가 책임연구자인 '근대전환기 인쇄매체를 통해 본 근대지식과 개념의 형성 및 변모양상에 관한 연구', 이종은 국민대 교수가 이끄는 '근대 한국의 국가건설 사상 연구', 구대열 이화여대 교수(외교학)의 '근현대 한국 자유주의 연구' 등이 진행되고 있는데, 정치·외교 쪽이 역시 주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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