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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23)-미국에서 세금의 의미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23)-미국에서 세금의 의미 
  • 교수신문
  • 승인 2019.08.19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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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많이 내는 것이 善인 나라
지위가 무엇이었던 미국에서 '신용'의 기준은 납세경력과 비례한다.
세금을 많이 내는 자가 곧 신용이 높은 자다.

 세금은 누구나 내기 싫어하는 것이고, 따라서 ‘될 수 있는 대로 떼어먹는 것이 좋은 것 아니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세금에 ‘나라 사랑’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거짓이고, ‘조건에 따라 더 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은 이타심을 가장한 자기 보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돈 적게 내고 많이 타먹는 것’이야말로 솔직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이야기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돈 적게 내고 많이 타먹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의 제1원칙이기도 하고, 우리가 물건을 구하거나 가격을 결정할 때 반드시 고려할 사항이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떼어 먹는 것’은 절세라는 멋있는 말로 포장되어 돈 좀 있는 사람이라면 작은 돈이 들더라도 큰 돈을 남기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야릇한 마음이 미국생활하면서 들었고, 그것이야말로 미국의 건강성을 유지시키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아직까지도 지울 수 없다. 과연 미국인에게 세금이란 무엇이기에 한국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납세감정을 잠시 생활한 외국인이 갖게 되었을까? 

 나는 우리나라의 부조리가 ‘건설’(집)과 ‘교육’(대학)에 집약되어있다고 생각했다. 건설 부조리는 근자에 와서 나아지는 것 같고, 교육 부조리는 여전하고 내 입장에서는 피부에 와 닿는데, 미국생활 이후 우리나라가 해결해야 할 부조리에 ‘납세’를 더 넣게 되었다. 세금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미국, 무엇 때문일까? 언젠가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짧게 하면 이렇다. 

 첫째, 미국에서 세금은 참정권과 관련된다. 미국의 탄생과 연관된다. 영국인들이 세금은 내라면서 참정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세금은 참정권의 기반이 된다.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영국의 버크(E. Burke)가 ‘납세 있는 곳에 참정권 있는 것이 옳다’고 식민지를 옹호해서 욕 좀 먹었다.

 둘째, 그래서 그런지 탈세자에 엄격하다. 시민, 곧 정치적 참정권이 있는 자라면 세금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을 위배하거나 기망하는 것은 시민의 자격인 참정권을 내놓는 것과 같다. 우리 정도라면 한 번의 실수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인데도, 미국에서는 한 번에 보내는 경우를 종종 본다. 우리의 재벌총수의 탈세사건이 그런 제도에서라면 몇 백 년 형을 받는다. 

 셋째, 우리의 주민번호 역할을 하는 사회안전번호(social security number)도 결국 납세기록이다. 따라서 외국인도 그 번호를 받는다. 한국 이민자들이 종종 후회하는 것이 젊어서 세금 적게 냈더니, 늙어서 작은 아파트 주더라는 것이다. 좀 더 낼 걸, 그랬으면 말년에 좋았을 텐데. 사회의 안전에 기여한 만큼 대접받는다. 

 넷째, 하루가 되었던, 한 살도 안 되었던, 여행객이 아니라 생활인으로 미국에서 사는 순간 세금신고는 의무가 된다. 유학생센터는 입구부터 세금신고서가 기본으로 놓여있다. 한 푼도 안 벌었다라고도 신고해야 한다.

 다섯째, 자국에서의 지위가 무엇이었던 미국에서 신용(credit)의 기준은 납세경력과 비례한다. 세금을 많이 내는 자가 곧 신용이 높은 자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다. 미국에서 대접받으려면 세금내야 한다. 세금내지 않으면 좋은 신용카드조차 못 받는다. 

 여섯째, 세금을 낼수록 목소리가 커진다. 이는 밥 살 때 괜히 목소리 커지는 것과 같다. 의무를 다할 때 느낄 수 있는 자신감과 소속감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가장 특이하게 느꼈던 변화였다. 돈 낼 테니, 나에게도 똑같은 대우를 해달라는.  


 그래서 그런지 의식 있는 미국의 유명 자산가들 가운데 부유세를 더 내자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다(G. Soros). 그래야 사회가 안정되고, 결국은 자기들이 더 돈을 벌 수 있다면서. 우리네 부자는 언제쯤 그런 말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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