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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그늘에서
언어의 그늘에서
  • 전은경 숭실대
  • 승인 2003.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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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전은경 숭실대·영문학

개강 날짜가 눈앞으로 다가오니 마음이 바빠진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 방학도 계획했던 일은다 마무리하지 못한채 끝나는가 보다. 여름 방학이 시작하면서 방학중에 해야될 몇 가지 과제가 있었고 그중 먼저 학진의 공동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일도 다 완성하지 못한 채 방학이 끝나버렸다. 그동안 국내에서 출간됐던 영문학 작품의 번역서를 공동으로 검토하고 평가하는 일이었는데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생각을 요하게 돼 마음이 조급해 지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소요된 시간돠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작업 과정에서 보게된 언어의 속성, 가령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되는 생명체 같은 성질이나 그 위력에 대해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고, 무엇보다도 우리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관심을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번역 검토 과정에서 동일한 작품에 대한 여러 번역서를 접하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각 번역자가 지닌 개성적인 언어구사에 따라 작품이 완연하게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는 점이었다. 마치 같은 곡을 다른 음색을 지난 악기로 연주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는 거처럼 번역자들은 같은 곡을 각자가 지닌 고유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너무도 개성이 짙은 어조로 번역할 때면 역자의 목소리가 원작가의 목소리를 압도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동감이 갔다. 또한 같은 작품에 대해 반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번역이 나오다보니 각 시대의 특징적인 언어구사와 어법을 관망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수한 번역을 가리기 위해 여러 지침이 제안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갖던 부분은 순수한 우리말의 구사였다. 번역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외국어와 그곳 생활 문화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아야 되겠지만 우리에게 더 시급한 것은 순수한 우리말을 발굴하는 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언어에 대한 감각은 마치 음식에 대한 미각과 같아서 자연수론 우리말을 읽었을 때의 그 편안함과 개운함이란 우리만이 알 수 있는 전통 음식의 맛을 보았을 때의 느낌과 같다. 돌이켜보면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영문학 원서에 둘러싸여 이들을 읽느라 바빴고 학위 논문도 해외에서 썼으니 우리말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 후에도 국문으로 논문을 쓴다해도 탐구 대상이 외국문학이다 보니 외국 작품과 참고문헌이  주요 관심이었고 우리말은 늘 뒷전에 밀려나 있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자연히 영어 구문의 국문 문장이 되기 십상이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수백년에 걸친 영국의 지배 하에서 영어가 모국어가 돼버린 아일랜드 출신의 현대소설가다. 그의 자서전적인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주인공은 영국인 신부 교수와 대화를 나누면서 내심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말하는 이 언어는 난의 것이기 전에 먼저 그의 것이다. '가정', '그리스도', '맥주', '선생'과 같은 어휘들이 그의 입술에 울려졌을 때와 나의 입술이 올려졌을 때 서로 얼마나 다를까! 나는 이 어희들을 말할거나 쓸 때마다 언제나 정신적 불안감이 든다. …그의 언어의 그늘에서 내 영혼은 조마조마하다."

우리 역시 언어의 식민지 상태를 체험하지는 않았는가. 오랜 세월에 걸친 식민지 역사를 지닌 우리도 조선시대에는 한자, 일본 식민지시에는 일본어, 해방 후에는 영어의 지배를 받아왔다. 너무도 익숙해져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쓰고 있는 외국어는 얼마나 많을까. 언어의 식민 상태는 곧 정신적 식민이다. 번역 역시 제 2의 창작이라면 우리에게 가장 편안하게 들리는 순수한 우리말로 원문을 풀어낸 것이 제대로 된 번역일 것이다.

올 여름 일 자체는 생각만큼 진척되지 못했지만 순순한 우리말에 대해 민감해지고 또 탐구하고 싶은 갈증이 생긴 것이 내게 예기치 못한 수확이다. 그러나 이 갈증은 또 하나의 과제를 스스로 내게 부담시키고 있으니 반갑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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