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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지혜·인내 그리고 ‘시간’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지혜·인내 그리고 ‘시간’이다
  • 교수신문
  • 승인 2019.07.2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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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유창모교수의 한일경제 갈등 해법

 

물리학에서 시간은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는 중요한 프레임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이 시간의 특수성을 밝히는 데서 출발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에서 시간은 느리게 간다고 하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물리학의 혁명을 통하여, 원자폭탄의 발명을 가져왔고, 이는 일본의 패망, 그리고 한국의 독립을 가져왔다. 시간의 또 하나의 특성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한번 흘러간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갈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역사나 세계사를 잘 정제되고 가다듬어진 TV의 드라마를 보듯이 되돌아보지만, 실제 진행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순간순간의 선택이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가슴 아픈 회한이나 위대한 결단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기해년 중반을 넘어가는 7월 1일에 일본은 세 가지 반도체 핵심 품목에 대하여 수출 규제를 공표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한일 갈등은 한반도 주변 강대국의 경제적 군사적 이익에 따른 대립과 맞붙어 한 치 앞을 예상치 못할 만큼 복잡하고 어려워져 가는 것 같다. 마치 흘러갔던 시간이 현대 무기를 가지고 되돌아와 구한말이나 임진왜란 초기를 다시 시작시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일본은 징용공 배상 판결에 대한 대법원 조치를 빌미로 반도체제조에 필수적인 고순도 불화가스, 감광제, 폴리이미드에 대한 수출중단을 결정하였다. 더 나아가 한국을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하고 8월 중순부터 첨단소재, 전자, 통신 등 1,100여 개 품목에 대한 광범위한 수출 통제를 확대하려는 아베 정부의 움직임은 한국 산업계에 공포로 다가오며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아직 별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정부와, 이런 정부를 물고 늘어지는 야당 그리고 이에 합세한 일부 반정부적 언론의 조롱, 그리고 언제나 이런 위기 상황이면 나섰던 우리 선량한 국민들의 불매운동을 통한 반일 감정의 확대 같은 국론이 분열되는 혼돈 양상을 보이고 있다. 차분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현실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대응 전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현 상황의 진단과 대응에 대하여 백가쟁명의 소리가 있지만, 과학기술의 일선에 서 있던 연구자로서 일본 연구자들과 가끔 부딪치며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솔직히 반도체뿐만 아니라 한국 산업 전반이 곧 멈출 정도로 충격을 주지 않을까 걱정된다. 엄청난 경제적 타격이 올 수 있다. 제품 생산의 성격상 대체품 발굴이나 개발은 시간을 요한다. 현대의 산업, 특히 IT 제품은 한 회사가 모든 부품을 생산할 수 없는 구조이며 오히려 생산을 하면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이 현대 산업 구조이다. 아베 정부의 수출 규제는 이런 원리를 무시한 전근대적 행동으로서 결국 전 세계 IT 기업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 소재 공급처가 나올 때까지 당장 일을 멈춰야 하는 위기에 내몰리게 된다. 일본의 처사는 상당히 분통터지는 일이지만 이미 코앞에 위기는 닥쳐와 있고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다.

둘째, 반일 불매 운동으로 일본이 바뀔까? 아베 정부의 처사는 일본 극우 세력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일본인의 대다수가 동조하고 있다. 아베 정부의 이번 행동은 비열하다. 세계여론도 이를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기술과 경제 우위를 이용한 신정한론은 일부 정치가가 선거용으로 잠시 도입한 것이 아니고 적어도 30년 전 이전부터 서서히 추진해온 장기적인 것이다. 아베는 이런 극우 그룹을 대표할 뿐이다. 더 무서운 것은 일본 기업의 70% 이상이 찬동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부품 수출 규제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일 불매 운동으로 우리 국민의 감정을 보여 줄 수는 있지만, 일본은 한번 꺼낸 칼을 칼집에 쉽게 다시 넣지 않을 것이다. 일본이 칼집에 칼을 넣을 즈음이면, 한국 기업이나 우리 경제에는 상당한 손상이 가 있을 것이다.  

셋째, 국산화가 가능할까? 원론적으로는 가능하다. 일례로 LG화학을 비슷한 분야의 미쓰비시(三菱)화학에 비교해 보면, 매출은 약 1/2, 연구개발비는 1/8 정도이나 특허 출원건수는 9배로 월등히 높다. 기술격차도 어떤 것은 별로 크지 않고, 어떤 것은 아예 없다. 그러나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아직 일본과 한국의 노벨상 수상자 비는 24 대 0, 필즈 메달 수상자는 3대 0의 지독한 열세에 놓여 있다. 미래를 향한 제품 연구 개발에서 우리에게는 경쟁력이 있다. 그러나 당장 필요한 반도체 공정에 제품은 밤을 새워도 며칠 내에 만들어 공장에 투입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검증과정과 이에 따른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이 기업과 국가의 피를 말릴 것이다. 아직 터지지 않았지만, 길게 보면 특허도 문제다. 일본이 특허 제동을 걸어오면 여러 곳에서 큰 원천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제품의 경우, 우리 특허가 일본의 특허를 모두 방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특허의 경우 어느 정도 위험한 상황인지 정부는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철저한 조사와 대응책이 필요하다. 

넷째, 장기적인 전략은? 외부 충격에 견딜 수 있는 연구개발과 제품 생산 생태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중소기업의 제품개발을 위한 연구 환경, 이윤이 좀 더 보장되어야 한다. 대기업에 중소기업이 들어가 제품설명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디어가 대기업제품으로 되어 나온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업이 신뢰 속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약자의 착취와 아이디어 도용을 쉽게 할 수 있는 구조라는 것이다. 일본과 한국의 결정적이 차이는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대기업 직원으로서 자기회사의 생존과 이윤을 추구하다 보면, 더 질 좋고 값싼 일본 소재와 부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한국의 중소기업은 제품개발의 기회를 놓치고 자금, 인적 자원 확보를 못 하여 부실한 제품 생산에 머무는 악순환이 지속돼 온 것이다. 순도 99.9999999999%인 불화수소를 일본은 만들 수 있지만, 한국은 97% 순도에 멈춘 이유를 이런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한국의 기업 풍토 속에서 오늘날 같은 일본의 경제 보복은 언제나 쉽사리 가능한 일이었다. 애국심으로 무장된 불매 운동이 아무리 여론을 장식하고 우리의 감정을 자극해도 일본의 고품질 소재와 부품, 저가격을 기반으로 성장한 한국의 첨단 기업과 경제는 현실적으로 일본 기술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반도체가 아닌 저급기술에서도, 예를 들자면 유니클로의 옷을 가위로 자르는 반일적 퍼포먼스 보다, 유니클로 수준의 양질의 제품을 더 저렴한 가격에 만드는 생산 판매 체계를 구축하여 쫓아버리는 것이 진정한 극일 불매운동이 된다는 것이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말과 행동에 책임지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구호와 애국심만으로는 현재와 같은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 당당하게 맞서자. 이길 수 있다고 믿자. 그러나 이것은 당랑거철(사마귀가 수레를 멈췄다는 중국 고사)의 무모한 맞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전쟁은 정확하게 적을 알고 나를 아는 것에서 나온 장기 전략 바탕 하에 미래를 향한 우리 자신과의 싸움, 시간과의 싸움이 될 것이다. 경제는 무너져 내릴 위험이 있는데 이념 투쟁에 분열되어 흔들리면서, 백 년 전으로 돌아가 항일투쟁을 외치는 것은 성공 할 수 없다.  지금은 한발 물러나 더 큰 경제적 출혈이 일어날 것을 줄이고 미래를 대비하여야 한다. 이번 규제가 단기적으로는 악재이고 장기적으로는 호재라 할지라도, 국산화의 길은 멀고 힘든 길이며, 치밀하고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계획과 지속적인 투자와 노력을 요구한다. 비록 자존심은 상하지만 지금 당장 우리에게 가능한 해법은 정치, 외교적 수단에서 우선 찾아야 한다. 무리한 접전을 피하고, 우리가 일본과 진정으로 맞서는 힘이 길러지는 그 날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벌어야 한다. 등소평의 도광양회의 지혜를 빌려 참고 참아가며 힘을 길러가며 기회를 노려야 한다. 두 번이나 우리를 침략한 일본은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이번 수출 규제도 준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도발한 것이 아닐 것이다. 유창모(물리학·포항공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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