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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 ‘메멘토 모리’부터 ‘카르페 디엠’까지
[최재목의 무덤기행] ‘메멘토 모리’부터 ‘카르페 디엠’까지
  • 교수신문
  • 승인 2019.07.22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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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無의 덤’을 생각하다”

3. ‘사(死), 죽다’ - 죽음이란 무엇인가?

해인사 비림
해인사 비림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죽을 사(死)’ 자는, ‘?’(알: 부서진 뼈)과 ‘匕’(인: 人의 변형태)의 합성이다. 사람이 죽은 뒤 앙상히 뼈만 남은 모양을 나타낸다. 넋[魂. 정신]은 나가고 얼[魄. 골육]이 흩어진 것인데, 결국 이것마저 흙?먼지[塵土]가 된다는 것이 동양적 사고이다. 

‘사’ 외에도 죽음을 뜻하는 글자에는 ‘망’(亡), ‘졸’(卒), ‘몰’(沒), ‘서’(逝), ‘거’(去), ‘붕’(崩), ‘유’(孺), ‘요’(夭), ‘절’(折), ‘열반’(涅槃) 등이 있다. 각각 죽음의 의미 내용이 다르다.


“죽음을 기억하라!” 라틴어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네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이 경고 섞인 말은, 우리 식으로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꽃은 열흘 내내 붉게 피는 것이 없다). 달도 차면 기운다.”이리라.


우리는 앉으나 서나 삶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 뿐, 사실은 앉으나 서나 삶의 종말인 ‘죽음’의 부름, 손짓에 불안해하고 있다. 죽음은, 삶 그 내부에 잠복해 있으면서 가끔 고개를 쳐들고 ‘나 여기 있소!’라며, 존재를 과시한다. 일회적이고 유한한 삶의 시간과 의미를 성찰하도록 끊임없이 닦달하는 ‘마지막 어휘’ (final vocabulary)이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이상은 노래, 「언젠가는」)라는 노랫말처럼, 살아있을 때는 삶을 잘 모른다. 삶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젊은 날에는 죽음의 투시점이 멀다. 죽음 앞에 서보려는 마음도 없거니와 개념 자체가 생소하고 막연하다. 하지만 잘 보이지는 않으나 상상해보면 마치 얼굴에 복면을 한 강도처럼, 무섭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 앞에만 서면 어질어질하게 ‘정신적 경련’(mental cramp)’이 일어난다.


죽음에 투시점이 가까워질 때는 언제일까. 청춘의 봄날은 아니다. 병들거나, 나이가 들어 늙어가는 황혼기이다. 어쩔 수 없이 그놈(=죽음)의 목소리가 들리고, 얼핏얼핏 저승의 어둠이 깔려오기 시작할 때 인생의 허무감을 느끼게 된다. ‘무한 절대 시간’[=天]③ 속의 삶은 찰나이다. 그래서 불안하다. 밝지 않고 어둡다고 느낀다. [* ①②③ 번호는 논의 전개를 위해 필자가 임의적으로 붙인 것임. 이하 같음]


고대 인도인들은, 『바가바드 기타』나 『밀린다팡하』에서 말하듯, 몸은 ‘아홉 개의 구멍이 난 상처’로 보았다. 그 상처를 다독다독 달래다가 떠나는 것이 삶이다. 몸은 상처이고 아픔이기에 끊임없는 달램-보살핌을 통해서 치유된다. 그런 수행의 끝은 죽음이다. 산다는 것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이 지상’[=地]②에서 ‘죽어가야 할 자’[=人]①임을 알아차려야 하는 한계상황에 있다.

죽어야 할 자, 어디에 있나?  삶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 참 얄궂다. 성철스님의 상좌 원택스님은, 죽음을, ‘문이 닫히는 순간…이쪽 세계도 모르고 저쪽 세계도 모르는 순간’이라 하고, ‘문이 닫히면 기억하고 챙길 겨를이 없’으니 결국 삶은 “다 내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한용운은 시 ‘나의 길’에서 이렇게 읊었다.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 밖에 없습니다./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일입니다./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아아, 나의 길을 누가 내었습니까./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었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여기서 님은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자이며, 다른 말로 하면 신비로운 ‘우주적 섭리’[=道]④이다. 

후박나무 아래 법정스님 계신 곳
후박나무 아래 법정스님 계신 곳


법정스님은 ‘간다, 봐라’하고 세상을 떠나 송광사 불일암의 후박나무 아래 묻혔다. 간명하게 삶의 종말을 여실히 보여주고, 우주 자연의 ‘무한 절대 공간’[=地] 속 일부로 자리했다. 결국 인간은 ‘죽어가야 할 자’[=人]로서, ‘무한 절대 공간’[=地]과 ‘무한 절대 시간’[=天] 속에서, 경이로운 ‘섭리’[=道]의 절로절로 그러한[=自然] 운동 속에 놓여있다. 이처럼 삶은 <인(人)①⊂지(地)②⊂천(天)③⊂도(道)④> 식으로, 서로 ‘겹쳐-머금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을 노자는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했다. “죽어야 할 인간은, 땅이라는 공간에 따라 규정되고, 또 공간은 시간에 따라 규정되고, 다시 시간은 우주의 무한한 자기규율성에 따라 규정되고 있다.”는 뜻이다. 아울러 노자는 인-지-천-도를 ‘무한 우주’[域] 속에 존재하는 ‘위대한 네 구성요소’라 하였다[域中四大]. 그릇 속에 그릇이 묻혀들어 간 겹겹이상자, 인형 속에 인형이 5겹 6겹으로 숨어든 목제 러시아 인형 마트료쉬카를 생각해보자. 겉의 인형은 ‘죽어야 할 인간’이라 보면, 그 속엔, 보이지 않으나, ‘시간+공간+우주의 섭리’를 서로 겹쳐 머금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하나를 말하면, 그 나머지 셋이 그 속에 들어 있다. 하이데거도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를, <①땅 ②하늘 ③신성한 것 ④죽을 자>의 넷으로 보고 이것을 ‘사방’(Geviret)이라 하였는데, “인간은 사방-내-거주자이며 어느 하나를 말하면 나머지 셋은 그 속에 겹쳐있다.”고 본다. 어쩐지 노자와 흡사하다.    
    
‘삶의 진정한 스승’ 죽음, 거기로 가는 길
노신은 에세이집 『무덤』(墳)의 후기에서 말한다. “중국에는 대개 청년들의 ‘선배’와 ‘스승’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러나 나는 아니며, 나도 그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다만 하나의 종점, 그것이 바로 무덤이라는 것만은 아주 확실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이므로 누가 안내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길에 달려있다. 그 길은 물론 하나일 수 없는데, 비록 지금도 가끔 찾고 있지만 나는 정말 어느 길이 좋은지 알지 못하고 있다.” 죽음은 누구나 가야할 길이다. 문제는 거기로 가는 방법이다.


그 길은 아무도 협력하거나 구원해 주지 못한다. 홀로서 뚜벅뚜벅 걸어 가야한다. 세존이 수보리에게 “나는 그렇게 많은 일체중생을 무여열반(無餘涅槃: 남김없이 온전한 열반. 즉 ‘죽음’)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사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시치미를 뚝 뗀다. 이처럼 생로병사는 오롯이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생로병사의 섭리는 노자가 말한 ‘도법자연’처럼, 그냥 절로절로 그렇게 그렇게, 움직여가는 것이다. 누가 손을 대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 흐름을 막아줄 수 없다.


장자는 인간의 삶을 종기나 혹 같이 보았다. 산다는 것은 고단하게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이며[倒懸] 죽음은 그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懸解] 즉 해방이다. 만물들의 본래 고향인, 형체도 없고 기운도 없는 ‘무’(無)로 돌아가서, 푹 쉬는 것이다[息我以死]. 그러니 죽음은 슬퍼할 것이 아니라 축하해야 할 일이고 기뻐해야 할 일이다. 죽음을 싫어하는 자는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어려서 고향을 뛰쳐나와 타향에서 방랑하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잊은 자와 같은 것이라 보았다. 장자는 부인의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는 대신 두 다리를 쭈욱 뻗고서 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에게 죽음은 우주적 섭리이며, 삶을 안식케 하는 축복이자 빛이었다. 죽음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농담을 하였고, 카토스는 자신의 장기(臟器)를 번롱(?弄)하였고, 에피쿠로스는 죽음 자체에 휘둘리지 않고 죽어가면서 와인을 꿀꺽꿀꺽 마시는 등 편안하게 즐겼다 한다.   

죽음도 삶도 만들어진 상(想)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잘 죽어가는 방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죽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몽테뉴는 『에세』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 세 가지를 말한다 : ① 아예 외면하고 등을 돌리다가 죽음의 그 짧은 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기. ② 앉으나 서나 죽음을 생각하며 대비하기. ③ 죽음에 대한 그릇된 상상이나 잘못된 관념=‘독사’(doxa)를 벗어나, 제대로 된 바른 앎=‘에피스테메’(episteme)를 갖기이다.


①은 보통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방식이리라. ②는 죽음과 맞붙어서 용기를 가지고 생각하고, 준비하며, 나아가서는 그것에 대해 철학하는 것이다. 이런 지혜를 통해 죽음에 맹목적으로 굴종하지 않고 자유롭게 될 수 있다. ③은 죽음을 전망하는 정확한 위치를 확보하고 그 면전에서 눈알을 응시하며 남의 이야기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일반적 죽음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특수한 진지한 문제로 바뀐다. 남들이 ‘카더라’는 흔한 보통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발등의 불’로서 진지하고 특수한 문제로 바뀐다. 그래서 그것을 알아가며, 그것과 친해지며, 그것과 화해하는 길로 나아간다.


몽테뉴는 ‘탄생의 첫날이 죽음의 첫날’이라 생각한다. 이럴 때 죽음은 멀리서 어렴풋하게 보여서 불안감, 공포감만 커지며 마치 복면한 강도 같은 환영을 가져오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상’(相=想), 이미지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상=개념이 우리를 무섭게 한다. 『금강경』에서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열반도 없고 번뇌도 없다고 하였다.

죽음은 어둠? 빛? - 외천명에서 낙천명으로
이렇게 해서, 삶의 영역 내에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지성으로 죽음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와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면 편견 없이, 삶이 어차피 이행해가야 할 자연스런-당연한-올바른 이해를 할 길이 열린다.
그 결과 죽음은 어둠=불안=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빛=안심=수용의 대상으로 바뀐다. 동양에서는 이런 것을 ‘지천명’(知天命: 천명을 앎)‘에서 ’외천명‘(畏天命: 천명을 두려워 함)으로, 외천명에서 ‘낙천명(樂天命: 천명을 즐김)’으로의 전환으로 인식한다. 천명은 자연의 섭리가 만든 운명 혹은 숙명을 말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래야 어쩔 수 없는 사태를 말한다.

죽음을 수동적으로 망상하는, 그 꽁무니나 뒤따르며 불안해하는, 무섭고 두렵고 차갑고 우울한 것이 아니다.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제대로 이해하면, 그 면전에 서서 바라보며 심지어 그를, 비껴가는 것이 아니라, 추월해 갈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죽음을 나 자신의 주체적 문제로서 바꾸고, 죽음에 대한 독해력, 그것을 바라보는 안목의 해상도를 높여가야 한다. 그럴 때 죽음은 따뜻하고 명랑하고 유쾌하며 해학적이며 밝은 것이 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섭리를 즐기는 ‘낙도’(樂道)이다. 이것은 죽음을 결정론적 차원에서 자유의 차원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어쩌다 죽음에서 제대로 죽기
기계는 죽음이 없다. 해체되고 사라질 뿐이다. 가끔 영화 속에서는 깨닫고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인공지능이 있긴 하나 현재까지는 공상이다. 마찬가지로 동물에게도 죽음이 없다. “동물들은 죽음을 죽음으로서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동물은 제대로 죽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나자빠지거나 내팽겨 쳐질 뿐”이라고 철학자들(하이데거, 데리다)은 생각한다. 너무 인간중심적인 이해방식일 것 같으나, 일단 동물들이 주체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고, 느끼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어쩌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죽어갈 수 있다. 죽음을 제대로 알고, 잘못된 관념(=독사)을 벗어나 제대로 된 바른 앎(에피스테메)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박나무 아래 법정스님 계신 곳
후박나무 아래 법정스님 계신 곳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라틴어의 카르페 디엠, 즉 ‘현재를 즐겨라!’는 것은 동서양이 통한다. 죽음에 대해 그릇된 상상?잘못된 관념을 벗어나, 제대로 된 바른 앎을 가지고 사는 연습은 생애의 주요 일과로서 매일매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죽음의 불안?공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죽음의 의미를 자발적, 능동적으로 음미하면서, 순간순간의 자각 속에서, 삶을 더욱 진지하고 탄탄하게 살아가는 촉진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란, 하이데거에 따르면 ‘알고 있고, 해명할 수 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고, 제대로 해명할 수 있으며, 자신의 말로 이야기 할 정도라야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고 하겠다. 이 때 비로소 하이데거의 말대로 ‘제대로 죽을 자격’, ‘제대로 죽을 능력’을 갖게 된다. 신비로운 죽음 속으로 홀로 뚜벅뚜벅 그 의미를 곱씹어가며 걸어 들어가는 연습은 죽을 능력, 죽을 자격증을 갖기 위한 것이다.


내 삶의 진정한 고향으로 가는 길은 처음 가는 길이자 낯선 길이리라. 그곳은 미지의 땅이기에 어둠?불안?공포?종말로 상상되기 쉽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라는 제대로 된 앎을 통해,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필연적이고 자유로운 입장에 설 수 있다.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 주체적인 해명 속에서, 죽음은 빛?평온?안정이라는 관점으로 전환된다. 우리 삶의, 신비한 다른 한 차원이 죽음의 이해 그 깊은 곳에 묻혀 있다.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발 내딛는 곳마다 안락국’으로의 인식 전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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