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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19)-25분의 1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19)-25분의 1
  • 교수신문
  • 승인 2019.07.15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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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에서 펜까지…그리고 천원숍의 씁쓸함

필기구에 대한 욕심은 서생이라면 갖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필기구 모음을 벗에 비유했을까. 붓, 벼루, 먹, 종이다. 

흔히 넷을 꼽을 때 지필묵연(紙筆墨硯)의 순서로 말하지만, 종이가 없으면 나무에 써도 되고 묵이 없으면 쪽물에 찍어도 되고 벼루가 없으면 자갈돌에 갈아도 되니, 가장 중요한 것은 붓 같다. 꼴은 나와야 하므로. 

붓이란 말도 기본적으로 ‘필’(筆)의 중국원음이 /빗/ 또는 /븻/이고 그것을 /ㄹ/로 통일한 것은 후대의 성운학적 작업에 따른 것이므로, 한자음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겠다.(내심 한자 어원설에 자주 동조하는 국어학자들을 의존적이거나 너무 쉽게 단정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나도 어쩔 수 없다.) 원음의 입성(入聲)이 /t/로 발음되었던 것이 /ㄹ/로 자리 잡는 것은 영어의 /워터/(water)가 /워러/로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오늘날 우리가 ‘펜’을 번역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실제로 먹 대신 오징어나 낙지 먹물로 글을 쓴 이야기는 많이 있다. 정약용도 그런 적이 있고, 문필가들은 둘 중에 어떤 먹물이 좋을지 늘 궁금해 했다. 문제는 오징어와 낙지가 가리키는 것이 거꾸로 되기도 해서 헷갈린다는 것이다. 북한이 그렇다. 따라서 정약용이 해남 시절 애용하던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고증이 필요하다. 

사실 나는 중학교 입학 선물로 막내 삼촌에게 만년필을 사달라고 했다. 문학도였던 이모가 애지중지하던 만년필이 탐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싸구려 만년필은 늘 말썽이었고, 이모가 주장하듯 ‘좋은 잉크 쓰면 나쁜 만년필도 잘 나온다’는 것도 어느 정도나 돼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중학교 내내 나는 먹물을 갈아 그야말로 날 펜으로 필기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 종이는 마분지(馬糞紙)라는 누런 것이었다. 볏짚이나 보릿짚으로 만든 이른바 말똥종이였으니 자주 뜯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드디어 내가 만년필을 갖게 된 것은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 시절 면세점에서 산 유명만년필이었다. 검은 자루에 하얀 눈이 피어있는 그놈은 참으로 고귀해보였다. 아직도 갖고는 있지만 필기구가 도처에 널려있는 이 시절에 그놈을 다시 꺼낼 의향은 없다. 불편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분실 우려 때문이다. 

그놈으로 석사 논문을 옮기도 또 옮겼다. 쓰는 것만으로도 어깨 쪽 팔뚝에 알이 매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그때였다. 운 좋게도 같은 상표의 만년필을 자기는 쓰지 않는다면서 선배가 준 것이 그놈보다 가벼워서 통증을 덜게 해주었다. 전문가가 되려면 필기구도 가벼워야 했다. 신발처럼 말이다. 

그런데 천원 숍에서 만년필 형태의 일회용(갈아 끼는 잉크가 하나 더 들어있는) 만년필을 사보았는데 매우 잘 나와서 몇 주 동안 꼼짝 못했을 때 오랜만에 즐길 수 있었다. 보기는 그냥 일회용 필기구인데, 만년필처럼 펜촉이 정정당당하게 달려있는 것이었다. 촉감도, 무엇보다도 속도감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가 모양도 면세점에서 5만원에 파는 것과 같은 만년필을 발견하고 샀는데, 속도감에서(특히 처음에 시작할 때) 말썽이 있고 강약조절에 어려움이 있지만, 겉만큼은 멀쩡한 놈이었다. 단돈 2천원이라니. 면세점에서 5만원에 산 놈을 하루 만에 잃어버려 가슴이 쓰렸는데 25분의 1 가격으로 같은 놈을 구하다니, 갑자기 보상 받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중국의 힘에 편승한 가녀린 조선 학자의 씁쓸한 위안이었다. 붓에 이어 펜조차 수입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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